원조 원외랑공(員外郞公)의 이름(諱)은 신보(臣保)이고 중국 송(宋)나라 절강성(浙江城) 출신이며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을 역임한 당대 명망(名望)이 높은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송(宋)나라가 망할 무렵 충신(忠臣)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節槪)로 고려국(高麗國)으로 망명하여 관직으로 인주태수(麟州太守) 직을 행하였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의 종2품 관직을 추봉(追封) 받았다
공이 고려국 간월도(충남서산 앞바다)에 망명 정착하니 1237년 고려고종 24년이다 당시 고려풍속이 불교를 크게 숭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명 유교(儒敎)라고 하는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 하니 명현(名賢)이라는 칭송과 함께 그 명성(名聲)이 온 나라에 자자했다 이때가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시초가 된다.
공은 고려 의종, 명종시대 명유(名儒)석학(碩學)으로 해동7현(海東七賢)의 대학자 현정(玄靜) 오세재(吳世才)선생의 증손녀인 고창군부인(高敞郡夫人) 吳씨를 배필로 맞아 슬하에 서산정씨 始祖인 장남 양렬공(襄烈公) 인경(仁卿)과 차남 준경(俊卿) 두 아들을 두었으며 관직으로 麟州 太守職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번화가인 대사동 남원마을(서산시석남동)로 주거(住居)를 옮겨 거주하다 1271년 별세하셨으며 공의 유해(遺骸)는 현재 충남서산시성연면오사리 산95번지에 안장(安葬)되어있다.
公이 고려에 망명한 후 송(宋)나라의 선진문물(先進文物)과 유도(儒道)의 높은 학문을 고려(高麗)의 후학들에게 널리 전수(傳授)함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功을 높이 인정받아 1292년 고려 충렬왕 18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라는 왕의 교육자문관직을 추봉 받았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175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조 양렬공과 함께 충남서산시 송곡사(松谷祠)에서 유림들이 정성을 다해 배향(配享)해 오고 있으며 2002년부터 증조부 충응공(應公)을 위시한 다섯 분의 선조님들이 모셔져 있는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에 위패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