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년,광해군이 즉위하자 그의 형 임해군은 왕위 계승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 不軌(불궤)의 움직임을 보였었다. 또한 왕위계승에 대한 불평을 명나라의 사신이 올 때 그에게 고소할려는 움직임도 보였던 것이었다. 이에 대북정권에서는 즉시, 반역을 꾀하였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에게 유배를 주청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혈육이므로 전은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과 역모에 죄는 주되 목숨만은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에 인홍은 광해군 정권 초기에 역모는 철저히 조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해야지 이에 대한 조사도중 전은설을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정권 초기의 권력기반을 뿌리 채 흔들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을 했다. 사실 광해군의 즉위직전 왕위계승에 대한 논란이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선조와 영의정인 유영경의 소북이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므로 사실 몇번이나 광해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위기가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 후에도 아직 소북의 영수인 유영경이 영의정에 남아 있었고, 소북의 세력이 잔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이 역모사건에 대해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결국에는 이이첨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감 이직을 시켜 죽이게 한다. 정권초기의 불안한 출발이었다.
또한 명나라에서의 내부 권력싸움으로 광해군에 대한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고 명나라의 고명사신이 왕위계승에 대한 조사차, 조선에 올 조짐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임해군을 직접 면담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의 사람들은 소북의 영창대군 옹호세력이었던 영의정 유영경을 파면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래도 선조의 시대에 7년동안 선왕을 보좌했는데 그렇게 파면할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대북의 완강한 요구에 의해 결국 광해군도 어쩔수가 없었다.
이 결과로 소북의 유영경, 김대래, 이홍로, 이효원등이 귀양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유영경대신 영의정에 오리 이원익이 제수되었고, 세상은 정인홍의 대북의 정권으로 장악되었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즉위 원년인 1608년에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이로 인해 가난한 농민들의 많은 공납을 줄여주고 부유한 사대부들의 공납 부담을 증가시켜 소유토지를 기준으로 한 누진세인 대동법으로 조세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하였다. 물론 토지의 소유자인 양반들의 반대가 잇따랐는데 광해군과 정인홍을 주축으로 하는 대북 정권은 이를 무마하며 경기도 일원에 시험실시하는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이외에도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611년에는 量田(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전란 때 황폐화된 토지를 다시 측량하며, 전란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국조보감> 등을 다시 편찬했고 전란때 소실된 춘추관, 충주.청주 史庫(사고)에 보관된 역대 왕들의 실록과 중요한 田籍(전적)들을 보완하기 위해 적성산 史庫(사고)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 나라의 왕조실록등 중요한 사료들은 깊은 산중의 사고로 옮기게 되고 참봉을 책임자로 하여 근처의 사찰로 하여금 이것을 지키게 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나라의 보고인 조선왕조실록을 지금까지 우리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보게 될 수 있는 것도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이런 정책들은 전란복구를 위한 시의적절한 것이지만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정책의 꽃은 외교정책이었다. 임진왜란을 분조로써 직접 이끈 광해군과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대북 세력은 누구보다도 외교정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임진왜란중의 정인홍의 辭義將封事(사의장봉사)의 上疏文(상소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외세의 의존은 잠시여야지 오래되어서는 안되며, 국가의 침탈은 외부에 의한 것보다 내부의 시의적적한 정책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이 시기 명나라는 자국 황제계승으로 광해군의 책봉을 늦추고 또한 사신으로 오는 엄일괴가 역모사건으로 귀양가 있는 임해군을 직접 면담하려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또한 그와 정인홍을 위시한 대북 정권은 만주의 소자하 중류 지역인 해두알라를 근거지로 여진족인 누루하치가 만주족을 차츰 정복하여, 광해군 즉위 시점에서는 만주지역 전역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광해8년(1616년)에 천명이라는 년호를 내세우고 나라를 후금이라 칭했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이런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에 응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었다.
1614년 정인홍은 中樞府(중추부) 判事(판사)로 군사 조직의 총괄자리에 제수받는다. 이는 만주지역의 후금이 강성해지고 이로 인한 조선의 사태가 급변하게 변하고 있는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정인홍의 탁월한 외교와 국방정책의 조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광해군과 정인홍을 위시한 대북 정권은 즉시 대비계책을 마련하고, 평양감사에 무장 출신인 박엽으로 교체하여 대포를 주조케 하는 등 사전 대비케 하고 명나라가 후금(나중의 청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파견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대북 정권의 측근 신하들과 숙의하여 파견 조선군의 도원수 강홍립을 몰래 불러 밀지를 내리게 했다.
밀지의 요지는 전력을 다해 후금과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붙어 조선군의 전력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광해군은 쇠퇴해가는 명나라와의 명분과 강성해지는 후금(청나라)과의 실리 사이에서 양쪽을 모두 취하면서 절묘한 실리외교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명나라의 원군으로 출정한 조선군의 강홍립은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게 항복하고는 조선군의 전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후금에 조선의 참전이 자의가 아니었음을 설명하였다. 이때 강홍립은 계속해서 후금에서 조선조정에 밀서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후금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정책도 현실적인 사실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실리 외교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일본에 대한 원한도 뭍어 둔 채 전란 때 선릉과 정릉을 훼손한 범인의 인도만을 요청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수교에 응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중 선조의 요동 망명 요청을 명나라는 자국의 일본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거절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냉혹한 외교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실리 외교를 펼쳤다. 광해군과 정인홍을 위시한 대북정권은 전란의 복구가 현실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이고 국가의 재건과 부강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는 실리외교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숭명사상이니, 배청사상이니 등의 명분은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현명한 군주였다. 또한 그를 뒷받침한 대북정권도 현실적인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그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의 안정과 국방의 강화, 그리고 국가의 재건이었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