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6년(중종31년) ;丙申年; 합천 가야산의 줄기인 상왕산(象王山)아래 조그만 마을, 선비집안에서 눈이 별같이 반짝이는 아이가 태어났다. 이가 래암 선생이며, 그는 당대의 인물이고, 함께 친교(親交)하고, 정적(政敵)으로 타투기도 했던 이율곡. 송강 정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그러나 다른 기록들에는 1536년,(중종 31년)생인 정철. 이이보다 한 살 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래암이 태어나면서 합천 가야산의 한 봉우리인 상왕산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해인사를 품고 앉은 합천 가야산에서 남쪽으로 곧게 뻗은 한 줄기에 있던 산이었는데, 그 모습이 큰 코끼리처럼 생겼다하여 상왕산(象王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상왕산에 무성하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죽었다. 그리고 래암이 태어날 때 그의 눈이 별빛처럼 초롱초롱하였는데 그가 눈을 떠 마주 앉은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하는 기세에 있어 감히 마주서서 쳐다보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래암은 태어나면서부터 기품이 절윤했다. 세 살이 되던 해, 어느 여름날, 아버지 정륜(鄭倫)이 기거하던 사랑방에 그가 살금살금 들어가, 아버지 륜(倫)이 늘 가까이 하며 읽던 性理書의 책장중 일부를 갖고 놀다 찢어버렸다. 후에 아버지 倫이 그것을 알고 래암을 불러 화를 내며 혼을 내어 주려고 하자, 래암은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 잘못했읍니다. 제가 갖고 놀다가 그만 찢어 버렸는데, 저에게 지필묵을 주시면 지금 당장 찢어진 부분을 다시 써 붙혀 놓겠읍니다." 라고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 倫(륜)이 지필묵을 주자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앉아 바로 찢어 없어진 부분의 글을 다시 써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 이후부터 아버지 륜(倫)은 그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과히 신동이었다. 한번 가르쳐준 글이나 문장은 두 번 다시 배우지 않아 모두 암기해 버리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다시 줄줄 외워버렸다. 이때부터 합천 일대에서는 정씨 문중에 봉황이 태어났다고 하며 그를 서산정문(瑞山鄭門)의 서봉(瑞鳳)이 될 것이라 했다.
1540년 늦은 가을 어느날, 래암이 다섯 살 되던 해, 이미 문장을 지었으니 그 유명한 제조문(祭鳥文)이다. 그가 다섯살에 집밖에서 참새 새끼를 가지고 놀다가 그의 부주의로 그만 참새새끼가 죽고 말았다. 래암은 너무 불쌍해서 엉엉 울다가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 참새새끼의 무덤을 만들고 집에 가서 지필묵을 가져와 제문을 지어 읽고 곡을 하며 고이 뭍어 주었다. 그때 조랑말을 타고 지나가던 선비가 우스광스런 애의 모습이 재미있어 이르기를 "애야, 무어하고 있니? " 하고 물었다. 이에 래암은 "참새새끼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있어요."하고 대답했다. 선비가 말하기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참새새끼에게 무덤을 만들어 주고 엉엉 울며 곡을 하니?.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니?" 하고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래암은 자기가 쓴 제문을 공손히 보여 주며 선비가 제문을 읽는 동안 가만히 선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詩(시)는 래암의 학문에 대한 의식을 대해 잘 나타난 시이다. 비록 義(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즉, 실제 儒學(유학)에서 가르치는 學文(학문)의 道(도)가 아니더라도 人倫(인륜)이나 도리에 맞는다면 그래도 이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라는 뜻이 담겨있다. 아직까지도 史學者(사학자), 現선비들(?) 사이에 읽혀지고 있는 漢詩이다.
래암이 열한 살 때, 그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글을 읽었다. 그 당시 해인사에는 많은 학승(學僧)이 있었는데, 뛰어난 학식을 가진 스님들도 많이 있었다. 그 때 스님들 사이에는 서로 학문을 자주 토론하며 자랑하려는 분위기가 있었고, 가끔 래암을 불러들여 학문을 토론하려고 하였으나, 어린 나이의 래암은 그것에 참여치 않고 혼자서 뒷방에 앉아 공부하며 간혹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學僧이었던 주지 스님에게 묻곤 하였다. 주지 스님은 어린 래암의 어려운 질문에 깜작 놀랄 때가 많았다. 래암은 스님에게 " 성리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읍니까?" 이 것을 배워 무엇을 해야합니까? 하고 질문했다.
래암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서울 사대부 집안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 당시 시골에 살며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보아 왔고, 공부를 하면서 그 당시의 유림이나 지방관료들이 경학이나 성리학에 빠져 실천적인 행동을 외면하고 삼정을 통해 백성에게 가렴하여 국가재정을 채우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을 것이다. 그의 어린 눈에는 선비가 공부하고 학문을 하는 것이 벼슬길에 올라 입신 양명하는 것에 소용되는 것이 많은 의문의 대상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열 한 살 되던 어느 여름날, 지방관료가 각 고을을 순시하느라 해인사에 들렀는데, 모든 스님들이 뛰어 나가 머리 숙여 맞이하는데, (注(주): 당시에는 스님들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천시여기는 풍조로 인해 각 절들은 그 지방의 수령 통제하에 있었음) 래암은 태연히 뒷방에 앉아 글만 읽고 있다가 그 지방관이 들어와 방에 좌정하자 그 제서야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암시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디에 뜻을 두고 있는 지를, 고집 피우는 어린 仁弘이었다.
이 어린이의 뜻을 알아차린 그 지방관은 기특하게 여기며 韻字를 주며 글을 지어 보라 했는데, 래암이 곧 이에 漢詩를 한줄 써내려 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해인사에서 쓴 영송시(詠松詩)이다.
이 글을 읽어 본 지방관은 감탄하면서 이 아이의 학문에 대한 영특함에 깜짝 놀랐다. 어린 래암이 學文(학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이 漢詩(한시)로써 표현한 것이다. 이 지방관이 바로 양희(梁喜)이다. 후에, 그는 래암을 그의 사위로 삼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