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仁弘의 국방과 외교적인 정치사상은 당시 구구한 事大的 氣風에 물들지 않고 당당히 자주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明나라 軍隊는 멀리서 왔고 오래 머물 수도 없다. 그들을 위해 계속해서 군량을 대는 것도 어렵고 국가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 또한, 그들의 명분은 조선 구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침략 당하는 것을 사전에 남의 나라 땅에서, 그것도 조선군과 함께 초기 진화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자주적인 국방책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光海君 시절에 明나라로부터 後金정벌에 원병을 요청 받았을 때도 內修를 주장하여 등거리 외교정치를 표방, 實益없는 사대주의 외교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仁祖反正의 구실이기도 하였으며 西人-老論으로 이어지는 尊華事大主義의 化身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실지로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明나라의 임진왜란 파병은 明나라 자국의 이익과 방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것을 은혜로만 알고, 우리나라 朝鮮의 안위에 위배되는 사대적인 외교노선은 결국, 인조의 삼전도 삼궤구복이란 항복의 치욕적 사건을 초래한 것이었다.
바로 인조쿠데타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된 光海君의 實利的 외교노선을 비판하여 명나라의 再造之恩을 망각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仁祖정권에서 西人들의 현실에 투철하지 못한 성리학적 명분주의와 ‘尊周大義’는 구체적으로 온나라 民衆이 또다른 전쟁를 피폐하게 되고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이래 가장 치욕스러운 삼전도의 항복과 정치자체를 파탄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鄭仁弘의 외교정치는 바로 현실을 냉엄히 바라보고 근본적인 기준이 명분이나 정권유지 차원의 사대주의가 아니라 민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보수파인 서인은 天理와 人倫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민중이 ‘호로(胡虜<奴>)자식’과 ‘화냥년’(還鄕女)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명분 하에 파병한 것은 덕분에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긴 큰 원인 중의 하나지만, 사실 그들의 위험한 국방을 위협하는 왜군을 조선과 함께 조선내에서 격파하고 초기에 의심한 조선과 일본의 합세한 군대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전라도가 함락되고 서해안이 뚫렸다면 왜군은 군량미도 확보하고 무엇보다도 특히 왜의 수군은 황해와 발해만을 거쳐 北京의 外港인 天津으로 중국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이 전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랴오뚱반도를 지나 북경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일본군의 공세에 한발 앞서 쫓기듯이 평양에 이르러 明나라에 援兵을 請하자는 이야기가 李恒福으로부터 나왔으나, 尹斗壽의 明兵에 대한 또다른 우환을 염려한 신중론도 있었다. 이러한 우환은 실제로 나타나 明兵이 朝鮮에 들어 온 후 柳成龍의 ??懲毖錄??에서 말한대로 당시 民衆이 “倭軍이 얼레빗이라면 明兵은 참빗이다”라고 하였고 정인홍도 ?辭義將封事?에서 明나라의 軍事的 後援은 잠시여야지 오래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당시 明나라는 비록 우리의 구원요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군사를 파병하였지만 그들도 앞서 밝힌대로 16C 이후 왜구에 시달려 왔고 일본의 ?假道入國?說에 주의하였다. 그리고 明나라는 임진왜란 중에도 혹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파병하였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東海外藩이면서 遼左藩籬인 朝鮮을 父母之仁으로 保護하기 위한 것, 즉 藩屬의 위급을 구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실지로는 명나라 자신들을 위한 파병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은 ‘再造之恩’라 하여 더욱 중국 明에 대한 事大思想이 정치사상에 배어들어 이것이 정파간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하였고, 명나라는 조선을 더욱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이러한 强盜 日本과는 壬辰倭亂 당시 和議란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開戰初인 임진년 4월에서 2개월 간과 정유재란 때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약 2개월 외에는 우리의 의병과 수군이 그들 일본 본토의 예비병력과 식량의 보급을 차단하고 이 때문에 힘을 잃고 패주하여 경상도 남해안의 일부 군현의 성에 웅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 때 그들은 일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강화조건에서 허풍을 치며 화의를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영의정 유성룡, 성혼, 이정암 등과 명나라 총독 顧養謙이 화의론을 주장하였고 이항복 등도 여기에 동조하였으며 명나라 遊擊 沈惟敬의 국제적인 사기협잡 같은 중간의 화의거래가 있었으나 뻔한 것처럼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 때에 南以恭, 文弘道는 유성룡을 탄핵하여 삭탈관작케 하였다. 鄭仁弘을 비롯한 경상우도 의병장들도 끝까지 왜적을 소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화의론을 비판하였다. 또한 내암은 명나라 군대의 힘입은 은혜와 그들 군대의 횡포와 정치적인 압박을 구별하여 논하고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辭義將疏에서 강조하였다.
국제간의 원조와 파병이란 사실 명분 뒤에는 그 보다도 항상 파병 당사국의 이익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간과하고 조선후기 宋時烈 등이 보여준 崇明排淸의 慕華事大主義는 민족이나 국가의 진정한 안보와 민생의 안정에 과연 어떤 이익이 되었는가 따져야 한다. 다시 말하여 자신이나 가문 그리고 속해 있는 당파의 이익을 국가민족에 우선하고 나아가 자주적이지 못할 때 민족을 파는 행위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조선왕조실록 2. 율곡전서 3. 역사 관련 서적. 4. 관련 교수들의 논문집.( 일부 내용은 관련 교수들의 논문집을 많이 참조했음)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