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庵門人에 관한 考察>을 읽고
우 현 구
문학석사
안동중앙고 교사
사재명 님의 본 論文은 來庵門人의 교육적 계승 과정과 교육사적 의의를 밝히기 위한 전제로서 내암의 문인이 형성되는 당시의 배경을 살피고, 이어 내암문인의 분석을 통하여 그들의 현황과 동향을 고찰한 것이다.
16세기 晉州圈을 중심으로 한 慶尙右道 일각에서는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등 15세기 嶺南士林派가 성취해 놓은 학문적·사상적 연원을 계승 발전시켜 같은 시기 慶尙左道의 退溪學派와 대칭적인 의미에서 嶺南學派의 2대 산맥을 이루는 南冥學派가 성립,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尙義·主氣」의 학을 핵심으로 한 이러한 남명학파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來庵 鄭仁弘이다. 비록 인조반정 후 내암의 처형으로 그의 문인들과 관련 후손들의 의도적인 단절에 의해 남명학파 사류들의 학적 연원이 변질되어 버렸지만 적어도 정인홍은 그 생존당시만 하더라도 경상우도사림의 절대적 추앙을 받으며 수백에 이르는 강력한 문인집단을 형성 - 宣祖 35년 그가 大司憲으로 入朝할 때 이를 배웅키 위해 孚飮亭에 모인 원근 門生의 수가 「幾至數百」하였다거나, 광해군 즉위 초 유배 중인 내암을 伸救하기 위해 居昌의 疏會에 참석한 유생들만 이백이었다는 기록들은 내암문인의 규모를 잘 시사해준다(이상《孤臺日錄》참고) - 이 학파를 영도함으로, 남명의 高弟로서, 그리고 이 지역 사림의 宗匠으로서 학계와 정계 일반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宣祖-光海 년간의 한 시대를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암문인에 대한 논고가 충분하지 않았는데 이제 사 선생님에 의해 내암문인을 단일 주제로 한 연구 논문이 나와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질의하여 高見을 듣고자 합니다.
① 자료의 문제입니다. 사 선생님께서 내암문인의 형성배경과 현황을 분석하시는데 주로 사용하신 《來庵集》소재 <門人錄>(이하 <門人錄>)은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수정 가필된 흔적이 다수 있으며 동일인이 두 번 나오기도 하고 字와 이름을 혼용하기도 합니다. 사 선생님께서는 중복 기재된 인물로 李守而(李大一)과 河性源(河渾)을 지적하시고 78명이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6명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河子益(河景受), 吳隆甫(吳汝牀)의 경우도 중복 기재된 것이 분명하니 모두 74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字를 혼입한 경우도 지적하신 鄭士古(鄭淳), 朴君信(朴廷 ), 李仲發(李天埴), 鄭德美(鄭仁徽), 鄭雲 (鄭 ) 외에도 河子順(河悌), 柳任可(柳震楨), 鄭德止 등 더욱 많이 보이니 이런 여러 가지 문제로 중복된 인물이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이 도저히 문인으로 볼 수 없는 사람도 나옵니다. 문인이라기보다는 師友 쪽에 가까운 茅村 李瀞, 月汀 裵明遠, 原泉 全八顧, 原溪 全八及 등이 그들입니다. 아울러 咸陽의 郡北 介坪에 세거한 潘南朴氏家의 朴文木英-朴以爀-朴尙圭 3代가 내암의 문인으로 나란히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내암 처형시 12세인 權鎔과 이제 갓 3세에 불과한 朴尙圭가 문인이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鄭仁弘萊庵集數十卷 傳在嶺南云 以其人之敗 自嶺以北無見者」(《星湖僿說》 卷12, 人事門)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내암의 文字는 그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筆寫된 형태로 널리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암의 후손들은 선조의 遺稿를 그 참혹한 家禍중에서, 또는 서인정권의 강도 높은 탄압과 주변의 온갖 질시와 냉대 속에서도 정성껏 보존했다가 1911년에 모두 15卷 7冊의 活字本으로 간행한 사실이 있습니다. 추측컨대, 일단 이 때의 刊本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문제의 <門人錄>은 그 한참 후에야 만들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내암과 관련된 문자의 상당부분이 훼손되어 그 추적이 어려운데다가 이 지역 유림들이 갖고 있는 내암으로 인한 일종의 피해의식과 거부정서 때문에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한 채 瑞山鄭氏家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3년에 2책의 양장단행본(亞世亞文化社刊)으로 《來庵集》을 영인, 출판할 때 미처 이를 자세히 검토하지 못하고 下卷 말미에 부록으로 첨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字와 이름을 혼용하고 수정 가필된 흔적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만 있고 다른 기록은 없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 생각됩니다. 이점에서 후대에 이 가문의 누군가가 내암 선생의 학맥을 복원하기 위해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며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門人錄>은 기초 자료로서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② 선행연구와 관련된 오류입니다. 먼저 10여년 전에 저는 내암 관련 자료를 추적하다가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面 黃山里 소재 鄭相元氏宅에 소장되어 온 낱장 형태의 <孚飮亭重修 案> 1장을 발견하곤 여기에 나오는 52명(1명의 경우는 이름을 판독하기 어려움)을 토대로 내암의 문인 집단을 拙稿 <來庵 鄭仁弘과 光海朝 政局主導勢力>이란 글을 통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萬曆 庚子(宣祖 33년)라 쓰여진 이 문건에는 먼저 22명의 이름을 쓰고 줄을 그어 追錄이라 구분한 다음 나머지 30명의 이름을 썼습니다. 《來庵集》소재 <門人錄>처럼 중복 기재된 인물도 없으며 자와 이름을 혼입하지도 않고 정확히 성명만 기재하고 있어 자료로서 별로 의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여기에는 전기한 <문인록>에는 나오지 않는 18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孤臺日錄》을 보면 선조 33년 이후에야 비로소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孚飮亭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散見 됨에 따라 이 시기에 부음정을 중수한 사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일 자세히 살펴보니 작성 시점으로 명기된 선조 33년(1600년)에는 출생하지도 않은 朴以爀(1602년생), 朴以烱(1608년생), 朴尙圭(1621년생), 權鎔(1612년생), 鄭光淵(1600년생), 金祥立(1601년생), 盧亨造(1612년생), 鄭世模(1622년생) 등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역시 朴文木英-朴以爀 - 朴尙圭 3대의 이름이 함께 나오니 추록의 의미나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도저히 당시의 것으로 볼 수 없는 등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늦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내암 문인으로서 孫昌後라는 인물은 제가 1988년 拙稿에서 처음 거론하였는데 본원의 이사이신 鄭琪哲씨가 수 년 전 지적한 적이 있어 다시 검토해보니, 이는「遺與兒孫昌後看」(《來庵集》 券12 雜著) 이란 제목의 글을 잘못 이해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孫昌後란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어 이제서야 이 자리를 빌려 그 잘못을 고칩니다. 「遺與兒孫昌後看」은 임진년 창의 기병 후 그 활약상을 간략히 정리함으로 손자가 장성하면 보도록 남겨준 성격의 글로 이해됩니다. 《孤臺日錄》 乙未年(선조 28년) 11월 13일조에 선생께서 여러 제자들 앞에서 손자 昌後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그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기록이 나오니 昌後는 아마 손자 의 兒名인 듯 합니다. 《來庵集》券12 雜著 祭子沇文을 보면 \'去年汝喪子 今年我喪汝\'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을 보기 이전에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미 손자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내암은 선조 23년 을 보게되자 뒷날까지 오래 살으라는 의미에서 兒名으로 昌後란 이름을 쓴 것 같으며, 선조 25년 10월 15일 아들 沇이 목병으로 병사함을 애통해 하다가 이 글을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기한 점에서 기왕의 연구성과에 몇 가지 문제가 있으나 사 선생님께서는 「其他 來庵의 門人으로 看做되는 境遇」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 이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③ 來庵의 門人으로 이해하신 사람들 중에는 門人이라기 보다는 黨人들로 보여지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閔夢龍, 孫倜, 兪大建, 李偉卿, 黃德符 등이 그들입니다. 예를 들면 孫倜의 경우에 《光海君日記》권44 3년 8월 9일 丙子條에 「仁弘之徒柳活姜翼文孫倜等」이라 한 기록을 典據로 내암문인으로 이해하셨는데, 실록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손척은 처음에는 洪汝淳, 그리고 홍여순이 肉·骨北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는 李爾瞻의 門客으로, 내암과 師生의 分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해 5년 成均館에 있으면서 仁穆大妃 처리 문제를 처음 제기하여 廢母論을 수창하였다고 지적되는 李偉卿은 남명의 생질이며 내암의 동문인 新菴 李俊民의 손자인데 평소에 내암의 제자라고 自稱한 경우로 역시 이이첨의 문객이었습니다. 일찍이 居鄕하면서도「遙執朝權」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宣祖-光海 년간에 걸쳐 그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來庵의 위세에 假託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李爾瞻이 있었습니다. 이이첨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 정국을 주도함에 있어 내암과 내암문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자신의 문객이나 자파사류들을 내암의 제자라 칭하면서 여론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李爾瞻이 내암을 尊師하고 스스로 문인이라 일컬으면서 그 道統을 넘보고 수제자라 칭했다해서 우리는 그를 내암의 高弟로 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점에서 특히 실록의 자료를 이용하여 내암의 문인임을 확인하거나, 이를 분석할 경우에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어려운 주제임에도 사실에 입각하여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시고 좋은 논문을 발표하셔서 이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본 연구를 바탕으로 내암문인의 교육적 계승과정 및 동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구명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 현 구
문학석사
안동중앙고 교사
사재명 님의 본 論文은 來庵門人의 교육적 계승 과정과 교육사적 의의를 밝히기 위한 전제로서 내암의 문인이 형성되는 당시의 배경을 살피고, 이어 내암문인의 분석을 통하여 그들의 현황과 동향을 고찰한 것이다.
16세기 晉州圈을 중심으로 한 慶尙右道 일각에서는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등 15세기 嶺南士林派가 성취해 놓은 학문적·사상적 연원을 계승 발전시켜 같은 시기 慶尙左道의 退溪學派와 대칭적인 의미에서 嶺南學派의 2대 산맥을 이루는 南冥學派가 성립,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尙義·主氣」의 학을 핵심으로 한 이러한 남명학파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來庵 鄭仁弘이다. 비록 인조반정 후 내암의 처형으로 그의 문인들과 관련 후손들의 의도적인 단절에 의해 남명학파 사류들의 학적 연원이 변질되어 버렸지만 적어도 정인홍은 그 생존당시만 하더라도 경상우도사림의 절대적 추앙을 받으며 수백에 이르는 강력한 문인집단을 형성 - 宣祖 35년 그가 大司憲으로 入朝할 때 이를 배웅키 위해 孚飮亭에 모인 원근 門生의 수가 「幾至數百」하였다거나, 광해군 즉위 초 유배 중인 내암을 伸救하기 위해 居昌의 疏會에 참석한 유생들만 이백이었다는 기록들은 내암문인의 규모를 잘 시사해준다(이상《孤臺日錄》참고) - 이 학파를 영도함으로, 남명의 高弟로서, 그리고 이 지역 사림의 宗匠으로서 학계와 정계 일반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宣祖-光海 년간의 한 시대를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암문인에 대한 논고가 충분하지 않았는데 이제 사 선생님에 의해 내암문인을 단일 주제로 한 연구 논문이 나와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질의하여 高見을 듣고자 합니다.
① 자료의 문제입니다. 사 선생님께서 내암문인의 형성배경과 현황을 분석하시는데 주로 사용하신 《來庵集》소재 <門人錄>(이하 <門人錄>)은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수정 가필된 흔적이 다수 있으며 동일인이 두 번 나오기도 하고 字와 이름을 혼용하기도 합니다. 사 선생님께서는 중복 기재된 인물로 李守而(李大一)과 河性源(河渾)을 지적하시고 78명이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6명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河子益(河景受), 吳隆甫(吳汝牀)의 경우도 중복 기재된 것이 분명하니 모두 74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字를 혼입한 경우도 지적하신 鄭士古(鄭淳), 朴君信(朴廷 ), 李仲發(李天埴), 鄭德美(鄭仁徽), 鄭雲 (鄭 ) 외에도 河子順(河悌), 柳任可(柳震楨), 鄭德止 등 더욱 많이 보이니 이런 여러 가지 문제로 중복된 인물이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이 도저히 문인으로 볼 수 없는 사람도 나옵니다. 문인이라기보다는 師友 쪽에 가까운 茅村 李瀞, 月汀 裵明遠, 原泉 全八顧, 原溪 全八及 등이 그들입니다. 아울러 咸陽의 郡北 介坪에 세거한 潘南朴氏家의 朴文木英-朴以爀-朴尙圭 3代가 내암의 문인으로 나란히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내암 처형시 12세인 權鎔과 이제 갓 3세에 불과한 朴尙圭가 문인이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鄭仁弘萊庵集數十卷 傳在嶺南云 以其人之敗 自嶺以北無見者」(《星湖僿說》 卷12, 人事門)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내암의 文字는 그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筆寫된 형태로 널리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암의 후손들은 선조의 遺稿를 그 참혹한 家禍중에서, 또는 서인정권의 강도 높은 탄압과 주변의 온갖 질시와 냉대 속에서도 정성껏 보존했다가 1911년에 모두 15卷 7冊의 活字本으로 간행한 사실이 있습니다. 추측컨대, 일단 이 때의 刊本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문제의 <門人錄>은 그 한참 후에야 만들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내암과 관련된 문자의 상당부분이 훼손되어 그 추적이 어려운데다가 이 지역 유림들이 갖고 있는 내암으로 인한 일종의 피해의식과 거부정서 때문에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한 채 瑞山鄭氏家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3년에 2책의 양장단행본(亞世亞文化社刊)으로 《來庵集》을 영인, 출판할 때 미처 이를 자세히 검토하지 못하고 下卷 말미에 부록으로 첨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字와 이름을 혼용하고 수정 가필된 흔적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만 있고 다른 기록은 없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 생각됩니다. 이점에서 후대에 이 가문의 누군가가 내암 선생의 학맥을 복원하기 위해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며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門人錄>은 기초 자료로서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② 선행연구와 관련된 오류입니다. 먼저 10여년 전에 저는 내암 관련 자료를 추적하다가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面 黃山里 소재 鄭相元氏宅에 소장되어 온 낱장 형태의 <孚飮亭重修 案> 1장을 발견하곤 여기에 나오는 52명(1명의 경우는 이름을 판독하기 어려움)을 토대로 내암의 문인 집단을 拙稿 <來庵 鄭仁弘과 光海朝 政局主導勢力>이란 글을 통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萬曆 庚子(宣祖 33년)라 쓰여진 이 문건에는 먼저 22명의 이름을 쓰고 줄을 그어 追錄이라 구분한 다음 나머지 30명의 이름을 썼습니다. 《來庵集》소재 <門人錄>처럼 중복 기재된 인물도 없으며 자와 이름을 혼입하지도 않고 정확히 성명만 기재하고 있어 자료로서 별로 의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여기에는 전기한 <문인록>에는 나오지 않는 18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孤臺日錄》을 보면 선조 33년 이후에야 비로소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孚飮亭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散見 됨에 따라 이 시기에 부음정을 중수한 사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일 자세히 살펴보니 작성 시점으로 명기된 선조 33년(1600년)에는 출생하지도 않은 朴以爀(1602년생), 朴以烱(1608년생), 朴尙圭(1621년생), 權鎔(1612년생), 鄭光淵(1600년생), 金祥立(1601년생), 盧亨造(1612년생), 鄭世模(1622년생) 등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역시 朴文木英-朴以爀 - 朴尙圭 3대의 이름이 함께 나오니 추록의 의미나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도저히 당시의 것으로 볼 수 없는 등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늦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내암 문인으로서 孫昌後라는 인물은 제가 1988년 拙稿에서 처음 거론하였는데 본원의 이사이신 鄭琪哲씨가 수 년 전 지적한 적이 있어 다시 검토해보니, 이는「遺與兒孫昌後看」(《來庵集》 券12 雜著) 이란 제목의 글을 잘못 이해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孫昌後란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어 이제서야 이 자리를 빌려 그 잘못을 고칩니다. 「遺與兒孫昌後看」은 임진년 창의 기병 후 그 활약상을 간략히 정리함으로 손자가 장성하면 보도록 남겨준 성격의 글로 이해됩니다. 《孤臺日錄》 乙未年(선조 28년) 11월 13일조에 선생께서 여러 제자들 앞에서 손자 昌後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그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기록이 나오니 昌後는 아마 손자 의 兒名인 듯 합니다. 《來庵集》券12 雜著 祭子沇文을 보면 \'去年汝喪子 今年我喪汝\'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을 보기 이전에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미 손자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내암은 선조 23년 을 보게되자 뒷날까지 오래 살으라는 의미에서 兒名으로 昌後란 이름을 쓴 것 같으며, 선조 25년 10월 15일 아들 沇이 목병으로 병사함을 애통해 하다가 이 글을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기한 점에서 기왕의 연구성과에 몇 가지 문제가 있으나 사 선생님께서는 「其他 來庵의 門人으로 看做되는 境遇」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 이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③ 來庵의 門人으로 이해하신 사람들 중에는 門人이라기 보다는 黨人들로 보여지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閔夢龍, 孫倜, 兪大建, 李偉卿, 黃德符 등이 그들입니다. 예를 들면 孫倜의 경우에 《光海君日記》권44 3년 8월 9일 丙子條에 「仁弘之徒柳活姜翼文孫倜等」이라 한 기록을 典據로 내암문인으로 이해하셨는데, 실록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손척은 처음에는 洪汝淳, 그리고 홍여순이 肉·骨北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는 李爾瞻의 門客으로, 내암과 師生의 分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해 5년 成均館에 있으면서 仁穆大妃 처리 문제를 처음 제기하여 廢母論을 수창하였다고 지적되는 李偉卿은 남명의 생질이며 내암의 동문인 新菴 李俊民의 손자인데 평소에 내암의 제자라고 自稱한 경우로 역시 이이첨의 문객이었습니다. 일찍이 居鄕하면서도「遙執朝權」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宣祖-光海 년간에 걸쳐 그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來庵의 위세에 假託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李爾瞻이 있었습니다. 이이첨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 정국을 주도함에 있어 내암과 내암문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자신의 문객이나 자파사류들을 내암의 제자라 칭하면서 여론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李爾瞻이 내암을 尊師하고 스스로 문인이라 일컬으면서 그 道統을 넘보고 수제자라 칭했다해서 우리는 그를 내암의 高弟로 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점에서 특히 실록의 자료를 이용하여 내암의 문인임을 확인하거나, 이를 분석할 경우에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어려운 주제임에도 사실에 입각하여 방대한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시고 좋은 논문을 발표하셔서 이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본 연구를 바탕으로 내암문인의 교육적 계승과정 및 동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구명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