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植 - 사후 4백년 재조명
실천하는 지성-권력에 줄 안서고 국민·역사편에 섰다
崔仁浩 <철학박사·대진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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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우리 국가 현실과 21세기 미래의 한국을 생각할 때 새로운 정보, 곧 시대정신과 학문사상의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본다. 즉 자연과학 기술과 경제적 성장수치만의 선진국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문화와 정보의 선진국이 되어야 모방의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시쳇말로 「전쟁과 고스톱에는 2등이 없다」고 했던가. 국제경쟁에서 2등 하려고 작정한 나라가 아니고는 영어회화와 컴퓨터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의 대학생과 이를 부추기고 있는 국가정책·사회현실 그리고 대학교과목 편성 등은 과연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고 요즈음 세태를 「말세나 윤리도덕의 타락」으로 규정하며 이제 그 약효가 의심스러운 유교의 「삼강오륜이나 충효」 등의 전통 예교(禮敎)를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자행된 헉슬리나 베버 등에 의한 약육강식을 합리화하는 「동물의 왕국」과 사회진화론이나, 동양 전통사상을 폄하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제국주의의 식민지 건설을 합리화하는 서구 근대화를 다시 정당화할 의도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요즈음 한국의 여성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인 「유교 봉건주의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폄하, 즉 조상의 전통에 대한 일방적 자기부정과 허무주의에 동조할 생각은 없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와 싸움을 벌여 과거를 부정해 버리면 미래는 없다.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 비판극복의 대상이거나, 반대로 미화찬양만 할 것은 아니다. 즉 전통에 대해 온고지신과 비판계승의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오늘날의 문제점을 비판·분석하여 우리의 미래를 올바로 전망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E.H. 카)라든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B.크로체)라는 역사철학적 논의 등을 통해, 바로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 역사와 인물은 계속 재평가돼야 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왜곡·날조되어 역사인 양 행세하거나 화석화된 역사인식과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은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망령이 되어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러한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 중에 조선 중기의 조식(曺植·1501~1572년)을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보다는 유교의 민본정치사상에 의한 실천적 정치개혁과 출처대의(出處大義·관리에 나아감과 물러남의 명분)에 확고했다. 그는 그러한 시국관을 몸가짐으로 시국의 참담함과 우국충정 그리고 애민(愛民)정신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상소문을 올려 현실을 비판하며, 그 광정(匡正·바로잡아 고침)의 방법을 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밤에 말없이 눈물짓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과 같은 말은 조식의 우국정신의 근본을 잘 나타내 준다. 조식은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란 나라가 태평세월일지라도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라를 생각하며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고 갈파했다.
또한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의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실천·실용적인 학문사상으로 선조(宣祖) 말년과 광해군 시대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조식과 그 제자들이 견지했던 실천적 학문사상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연원이 되었고 서양철학으로 보면 프래그머티즘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따라서 재평가 필요
그러면 왜 이들 남명학파가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는가. 가장 큰 이유로는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호는 來庵·1535~1623년)이 인조반정(궁정쿠데타)에 의하여 숙청당함으로써 스승인 조식과 남명학파 전체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조식이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소외되었고, 조식의 상소문 등이 왕가와 중앙의 부패한 조정과 훈척파를 질타하는 데서 많은 정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스승이며 사숙인(私淑人)인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남명학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태도가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유학자의 평가기준이 되는 문묘종사(文廟從祀·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함께 제사 지냄)가 인조반정 이후 모두 서인(西人)에게 치중되었다는 점도 조식의 존재가 후대에 알려지는 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연구자들에게는 『조식집』의 판본이 훼손되고 개정되는 등으로 인해 남명학의 본면목 파악이 왜곡되었다. 그리고 관계된 후손과 이곳 출신 유학자들이나 후손들이 꿋꿋한 자긍심을 지키고 조식의 학문사상과 실천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광해군은 조선왕조의 27왕 가운데 손꼽히는 능력과 그에 따르는 치적을 쌓았던 몇 안되는 왕 가운데 한 임금이다. 「모든 반란은 성공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성공한 반란은 반란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일 게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승자의 자기변명의 기록」일 뿐이라는 역사 회의주의자의 자조적인 말에 동조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5·16이나 12·12는 이른바 「구국의 혁명」이라고 운위되다가 최근 들어 「쿠데타적 사건」 혹은 「군사반란」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조반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
큰아버지뻘인 광해군의 왕위를 빼앗은 조카 인조의 반정에 대해 광해군의 부인 박씨는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도모인가. 아니면 그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역적모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핵심을 찌르고 있다. 1961년 5·16 때 박정희 소장은 『인조반정 때 인조의 심정으로 혁명을 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그의 생각을 교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인조반정에 대한 역사의식이나 역사철학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당시 국내와 국제질서의 혼란 속에서도 내치와 외교에서 훌륭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세자의 신분으로 분조(分朝·위기시 임시로 두었던 조정)를 이끌고 종횡무진 활약해 결국 임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 즉위 후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많은 토지를 개간하여 복구하였고 다행히 풍년도 거듭되었다. 그리고 궁궐을 복구했고 변방의 요새를 튼튼히 하였으며, 군대의 양성을 서둘렀다. 이밖에 문화사업을 강화하여 광범위한 문화재 파괴에 대해 이를 복구하고 많은 서적을 복간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책들을 중요시하였고, 유명한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도 이때 간행됐던 것이다.
인조반정 때는 처음엔 개혁을 실시하는 듯하다가 채 두달도 못돼 기존의 관리들인 훈구파와 왕실의 친인척인 척신 등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이러한 점으로 봐서 반정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반정 후에 오히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능가하였고, 국제 정치질서에서 현실감을 상실함으로써 두 번의 호란(胡亂)을 당했고 그 결과 민중을 이민족인 청나라의 칼날 아래 내맡겼다. 또한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일당전제(一黨專制) 정치는 철저히 기득권층을 옹호하여 반(反)민중적으로 흘렀고, 그보다 심한 외척의 세도정치가 이어져 나라가 결국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한일합방 때 매국노(글자 그대로 일본왕에게서 작위와 돈을 받았다) 76명 가운데 67명이 이들 노론과 왕족외척들이었으니 나라에 끼친 폐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 후손은 아직도 건재하고 이완용의 증손자는 땅을 찾는 현실이다.
광해군의 위민정책과 인조반정의 反動性
바로 이들 서인-노론에 의해 정인홍은 더욱 철저하게 폄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에 의해 망하자 민족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애쓴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우리의 역사 인물 가운데 「세명의 걸출한 인물」(三傑)로 육군의 을지문덕, 해군의 이순신, 정치에서 정인홍을 꼽아 새롭게 평가하였다.
조식의 명망이 알려지던 조선 중기 중종 말년에서 명종 년간 당시는 조광조의 왕도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고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훈척파들에 의해 정권이 농락당하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식의 엄정한 「출처」의식은 바로 우국애민사상으로서 현실비판과 나라사랑에 직접 연결된다. 「출처」란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에 머물면서도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실천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인 정인홍은 조식의 「행장」(行狀·일대기)에서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그 행사의 득실을 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스승의 말을 전하였다. 정인홍은 다시 『선생께서는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라고 하여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즉 조식의 출처사상은 『주역』(周易)에서 말한 대로 「임금(王侯)에게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그 하는 일이 고상하여(不仕王侯, 高尙其事) 많은 후세 사람들에게 출처대의를 깨닫게 하였다」고 보았다.
조식은 김굉필과 조광조의 학문과 그 실천적인 사림의 모습에는 존경을 보이면서도 출처문제에 대해서는 선견지명의 부족과 경험미숙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제갈량에 대해서도 대업을 이루기 불가능한 시절에 출사하여 민중을 어육(魚肉·짓밟혀 결단나게 됨)이 되게 했다고 평가했다. 또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인해 왕이 추방되고 시해되는 상황에 참가, 공신이 되고 끝내 사퇴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비판하였다. 다 아는 것처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과 「폐가입진」(廢假立眞·거짓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을 세움,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운 사건)이란 구실을 내세워 쿠데타를 행했다. 이와는 달리 조식은 고려말선초의 길재(吉再)에 대해서는 논전(論傳)을 짓고 그 출처를 인정하고 있다.
무릇 학문을 하는 자가 이 출처에 분명하지 않으면 바로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왕과 조정에 학자의 양심과 명예를 팔아먹는 꼴이 되고, 나아가 민중과 세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에 군림하는 비리와 악의 무리에 동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못하여 민중으로부터 원망을 듣는 정권일수록 지조있는 학자를 끌어내어 그들의 정권에 참가시키려 한다. 그것은 바로 비판세력을 무마하고 또 학자를 우대한다는 미명하에 그 학자의 재야적 명망을 퇴색시켜 버리고 끝내 올바른 비판세력마저 잠재우기 위해서다.
전·노 두 전대통령과 정치군인들이 정치 비자금 문제와 「12·12 군사쿠데타」·「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살문제」로 지금 감옥에 있고, 최근에는 정치권에서 그들에 대한 사면문제가 거론되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당시 그 정권에 참여한 학자들의 출처는 관심있는 문제다. 본분을 망각한 정치군인들을 이론이나 정신적으로 지원해 온 어용교수나, 총리장관으로서 노골적으로 정권에 참여하여 그 정권을 지지한 학자출신 관료들도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왜 정치군인들만 재판대에 세워야 하는가.
그렇다고 관련 학자들을 모두 재판하고 처단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정치비리나 사이비 학자관료들을 비판하는 통과의례가 있어야, 「민주화 운운」 하는 현재의 대명천지에 다시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매스컴에 나와 국민의 귀를 더럽히고 나라를 오도되舊?못할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책무와 출처대의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것을 모르고 지식을 팔아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일찍이 조식과 정인홍이 당시의 영예와 벼슬이 높았던 이들의 출처와 학문경향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어 말한 대로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하는 것이고, 「이익을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嗜利無恥)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한편 당시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여 당대의 두 쌍벽이며 국가원로인 조식과 이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조식은 그의 상소문(「戊辰封事」)에서 중앙조정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나 공물의 폐해와 함께 서리의 횡포를 날카롭게 지적·비판하여 이를 제대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지경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비해 같은 시기에 올린 이황의 상소문(「戊辰六條疏」)은 현실에 대한 진단과 비판 그리고 개선책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이전의 법과 제도를 함부로 고쳐서는 안되고 개혁적인 신진인사의 등용이 혼란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의 도심과 인효(仁孝) 등 전통예교와 윤리강상에 대한 이야기와 왕의 마음가짐 그리고 이단(異端) 배척에 강한 관심과 주장을 하였다.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찍이 맹자도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였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先富後敎)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도의(道義)가 행하여지는(있는) 세상(나라)에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도의가 행하여지지 않는(없는) 세상(나라)에서 부귀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요즈음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우리네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소수의 부귀한 사람들이나 혹은 다수의 빈천한 서민들이 부끄러워해야 할지 시쳇말로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러한 사회풍조에서 우국정신과 나라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 정인홍이 말한 대로, 「아래 사람(民衆)을 착취해서 위에 있는 사람을 살찌게 하는 자를 유능한 사람으로, 물건을 아끼는 자는 현실에 어두운 사람으로, 나라 사랑하는 자는 미치광이로 지목하는 습관에 물든 지 오래되었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니 외국 오랑캐가 쳐들어 와孤?알지 못하였다」고 한 그대로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경제적 급성장과 아울러 앞으로 21세기 미국과 패권다툼을 전개할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철학자 B.러셀이 1920년대 중국 전국의 유수한 대학을 1년 가까이 순회강연을 하며 말한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한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중국의 「신중화주의」에 맞물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도 거론되고 있다. 일본은 바로 몇년 전에 평화유지군(PKO) 법안을 통과시키고 다시 「세계평화」를 운운하며 일본군대의 해외파병을 서두르고 있다. 일제 말에 군국주의자들이 떠들던 이른바 「대동아공영뎠퐈뮌犬?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른바 「동양평화」, 그리고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방자하게 떠든 「정명가도」(征明假道) 등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역사 이래로 중국과 일본이 통일되고 강성해졌을 때 국가의 운명과 안정이 심상치 못하고 항상 고통과 질곡에 휩싸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나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비극을 다시 당한다」는 말에 경각심을 가지고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
「재물을 모으면 사람이 흩어진다」
조식은 상소문(「乙卯辭職疏」)에서 외교와 국방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당시 상황과 대처방안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쓰니(당시 문정왕후 등 훈구척신파나 왕조말 민비와 그 민씨정권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재물은 모이겠지만 백성은 흩어져 결국에는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 없고 성에는 군졸이 없다. 적이 침입하여도 무인지경이 되었으니 알 만하다」며 당시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구의 국경침입과 변란이 심상하지 않음을 경고하였다.
한편 조식의 왜곡부패된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과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려는 열망은 정인홍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정인홍은 상소문에서 「오늘날 형세는 사람이 중병에 걸린 것과 같다. 안으로 벼슬아치들의 도적질이 만연했고, 이후 바깥으로부터 무기를 든 외적이 침략했다」라고 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연전연패하던 시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58세의 나이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3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빼앗긴 성과 주둔지를 습격하여 탈환하는 교란작전을 펴고 연전연승했다. 이때 올린 위의 상소문은 조정에 대한 비판질타와 정치개혁 논의를 담고 있어 그 실천성과 함께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마침내 이긴 전쟁으로 이끈 실질적인 세력은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인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수군과,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곽재우·김면 등 57명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의병이 주축이었다. 그밖에 당시 분조를 이끌고 나라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약했던 광해군의 공은 그 누구보다 먼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밀리긴 하였지만, 왜군에게 한치의 땅도 할양해 주지 않고 끝내 바다건너로 물리칠 수 있었다.
한편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명분 하에 파병한 데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명은 국방을 위협하는 왜군을 조선과 함께 조선 내에서 격파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조선-일본이 합세한 군대가 쳐들어 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당시 정황을 보건대 만약 전라도가 함락되고 서해안이 뚫렸다면 왜군은 군량미도 확보하고 무엇보다 왜의 수군은 황해와 발해만을 거쳐 북경의 외항인 천진으로 공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또 만약 한반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까지, 또 허허벌판인 랴오뚱반도를 지나 북경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초기 왜군의 파상적인 공세가 있자, 평양으로 피신한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자는 이항복의 주장과 명나라 군대에 대한 또다른 우환을 염려한 윤두수의 신중론도 있었다. 이러한 우환은 실제로 나타나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에서 말한 대로 당시 민중들은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나라 군사는 참빗이다」고 할 정도로 명나라 군사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다. 그래서 정인홍도 상소문(「辭義將封事」)에서 「명나라의 군사적 후원은 잠깐으로 그쳐야 할 것」이라며 자주국방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유학」은 「사람에게 필요한 학문(人+需)으로서 실학을 뜻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실학일 때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실질·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의미 하다.
학문은 철저하게 국민을 바탕으로 공공성 지녀야
그 실학사상의 내용으로 정치의 공공성과 민본사상 그리고 제도개혁을 들 수 있다. 일찍이 정인홍은 「국가의 일은 일개 한 가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하였다. 즉 국가 권력의 소재와 행사는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민본을 바탕으로 하는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조식의 연결고리는 조식의 고제자인 정구(鄭逑)의 말년제자 허목(許穆)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정구는 조식과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허목은 이러한 정구의 학통을 상속했다. 그뿐 아니라 조식의 실학적 학풍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조선 후기 근기 실학파를 형성시켰다. 실학파의 거두인 이익(李瀷)과 그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허목을 통해 조식의 경세사상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받았다.
즉 조식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용상 유사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경제 문제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조식과 정인홍의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과 이익의 「장리론」(贓吏論)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鄕吏論)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모두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개정해야 함이 당연한 이치라고 본 일종의 변법사상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리고 실학파의 부국강병책으로 제시되는 균전적인 「한전론」(限田論)이나 「여전론」(閭田論) 그리고 병농일치적인 「부병제」(府兵制) 등은 이 주장들에 관심을 두고 문무(文武)에 대한 비중을 국가가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남명학파의 논의주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익은 그의 「퇴계조식」(退溪南冥)론에서 조식에 대해 「그 천길 벽이 우뚝하게 서 있는 기상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고 적시하였다. 또한 이익은 「경서(經書)를 연구함은 장차 치용(致用)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해석하면서 천하만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갖 책을 읽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이황의 글은 본래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政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 법령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이기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時務)의 큰 것을 대략 말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의 「진리란 바로 현실과 정치에 있다」(道在政事)는 담론을 새롭게 여길 때 실학사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위기 때마다 의로운 행동으로 이어져
조식의 평생 지우였던 성운(成運)은 조식의 묘비문(墓碑文)에서 당시 「조식의 깊은 학문과 높은 의리, 실천적인 유학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며, 오히려 평판이 사실과 다름을 개탄하고 백세 먼 훗날 아는 이가 나와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은 이후 경상우도 지역에서 면면이 발휘되었다. 조식을 사숙하고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병자호란 때 의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무신란(1728년)과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1862년) 등이 이 지역에서 발발하였다. 무신란과 임술농민항쟁은 노론의 일당전제와 외척세력에 의한 중앙조정의 부패한 정치와 왕위계승 비리,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에 대한 지나친 차별대우, 민중에 대한 탐학 등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또한 3·1운동이나 독립만세운동 등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운동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곳이 바로 이곳 진주와 합천 삼가면이었다. 그리고 천도교·기독교·불교대표 33인 중심의 3·1 만세운동과 병행하여 유교에서는 유림대표 1백37인이 중심이 되어 당시 제1·2차에 걸친 「유림단 사건」(儒林團 事件·巴里長書 事件)이 일어났는데, 그의 중심지가 이곳 경상우도로서 그 총대표자였던 곽종석(郭鍾錫)과 그 제자였던 김창숙(金昌淑,心山)과 김황(金榥) 등이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자 제자인 김우옹(곽재우의 손위 동서)의 13세 종손인 김창숙이 일제시대 독립운동 거두로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3년간 감옥살이와 고문에 의해 앉은뱅이(그래서 나중에는 호를 벽옹이라고도 하였다)가 되고, 해방 후 이른바 「황도유림」(皇道儒林)이라 불리는 친일파를 성균관에서 쓸어내어 민족전통대학인 성균관대를 새로 복구 설립한 것도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창숙은 신채호·이회영과 더불어 이른바 「북경삼걸」(北京三傑)로서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반대해 무장항쟁을 주장하여 국내외에서 일제에 대한 무장공격(테러)을 지휘하고 그 자금을 모았다. 그는 이승만의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당시 국가원로로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에 의연하게 맞서 그 독재와 부패비리를 꾸짖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김창숙을 성균관장과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이러한 와중에 그는 집도 없이 여관생활을 하며 쓸쓸히 임종을 맞았다.
조식의 의기사상이 전수된 진주에서 이후 일제시대 때 백정들의 신분타파운동이었던 형평사 운동이 벌어진다. 또 4·19혁명이 마산의 3·15의거에 의해 촉발된 것과 부마민중항쟁으로 인해 유신정권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보인다. 즉 우리 역사에서 국난과 국가의 위기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타협없는 불굴의 의리정신은 남명학파의 특질에서부터 이 지역에 살아남아 역사적으로 면면이 이어져 온 때문이라 생각된다.
■ 사진설명
①합천군 가야면에 소재한 부음정.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이 즐겨 노닐던 곳으로 알려졌다. 조식이 폄하됐던 원인중에는 인조반정을 시도한 서인들이 정인홍을 날조·왜곡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연유된 바 크며, 따라서 정인홍의 재조명은 조식의 재조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② 조식의 제자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시 왜적을 맞았던 창녕의 화왕산성. 석성 둘레가 2.6km, 우물이 9개, 연못이 3개로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산성이었다. 산성 안쪽에 창녕 조씨가 성씨를 얻었다는 득성지가 있으며, 화왕산 정상에는 억새풀이 장관을 이룬다.
③ 조선시대 도산·옥산서원과 더불어 3산서원의 하나로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던 덕천서원의 원임록. 채제공 등 쟁쟁한 인물들이 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전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씨가 원장을 맡고 있다.
실천하는 지성-권력에 줄 안서고 국민·역사편에 섰다
崔仁浩 <철학박사·대진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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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우리 국가 현실과 21세기 미래의 한국을 생각할 때 새로운 정보, 곧 시대정신과 학문사상의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본다. 즉 자연과학 기술과 경제적 성장수치만의 선진국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문화와 정보의 선진국이 되어야 모방의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시쳇말로 「전쟁과 고스톱에는 2등이 없다」고 했던가. 국제경쟁에서 2등 하려고 작정한 나라가 아니고는 영어회화와 컴퓨터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의 대학생과 이를 부추기고 있는 국가정책·사회현실 그리고 대학교과목 편성 등은 과연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고 요즈음 세태를 「말세나 윤리도덕의 타락」으로 규정하며 이제 그 약효가 의심스러운 유교의 「삼강오륜이나 충효」 등의 전통 예교(禮敎)를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자행된 헉슬리나 베버 등에 의한 약육강식을 합리화하는 「동물의 왕국」과 사회진화론이나, 동양 전통사상을 폄하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제국주의의 식민지 건설을 합리화하는 서구 근대화를 다시 정당화할 의도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요즈음 한국의 여성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문구인 「유교 봉건주의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폄하, 즉 조상의 전통에 대한 일방적 자기부정과 허무주의에 동조할 생각은 없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와 싸움을 벌여 과거를 부정해 버리면 미래는 없다.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 비판극복의 대상이거나, 반대로 미화찬양만 할 것은 아니다. 즉 전통에 대해 온고지신과 비판계승의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오늘날의 문제점을 비판·분석하여 우리의 미래를 올바로 전망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E.H. 카)라든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B.크로체)라는 역사철학적 논의 등을 통해, 바로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 역사와 인물은 계속 재평가돼야 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왜곡·날조되어 역사인 양 행세하거나 화석화된 역사인식과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은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망령이 되어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러한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 중에 조선 중기의 조식(曺植·1501~1572년)을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보다는 유교의 민본정치사상에 의한 실천적 정치개혁과 출처대의(出處大義·관리에 나아감과 물러남의 명분)에 확고했다. 그는 그러한 시국관을 몸가짐으로 시국의 참담함과 우국충정 그리고 애민(愛民)정신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상소문을 올려 현실을 비판하며, 그 광정(匡正·바로잡아 고침)의 방법을 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밤에 말없이 눈물짓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과 같은 말은 조식의 우국정신의 근본을 잘 나타내 준다. 조식은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란 나라가 태평세월일지라도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라를 생각하며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고 갈파했다.
또한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의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실천·실용적인 학문사상으로 선조(宣祖) 말년과 광해군 시대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조식과 그 제자들이 견지했던 실천적 학문사상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연원이 되었고 서양철학으로 보면 프래그머티즘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따라서 재평가 필요
그러면 왜 이들 남명학파가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는가. 가장 큰 이유로는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호는 來庵·1535~1623년)이 인조반정(궁정쿠데타)에 의하여 숙청당함으로써 스승인 조식과 남명학파 전체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조식이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소외되었고, 조식의 상소문 등이 왕가와 중앙의 부패한 조정과 훈척파를 질타하는 데서 많은 정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스승이며 사숙인(私淑人)인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남명학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태도가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유학자의 평가기준이 되는 문묘종사(文廟從祀·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함께 제사 지냄)가 인조반정 이후 모두 서인(西人)에게 치중되었다는 점도 조식의 존재가 후대에 알려지는 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연구자들에게는 『조식집』의 판본이 훼손되고 개정되는 등으로 인해 남명학의 본면목 파악이 왜곡되었다. 그리고 관계된 후손과 이곳 출신 유학자들이나 후손들이 꿋꿋한 자긍심을 지키고 조식의 학문사상과 실천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광해군은 조선왕조의 27왕 가운데 손꼽히는 능력과 그에 따르는 치적을 쌓았던 몇 안되는 왕 가운데 한 임금이다. 「모든 반란은 성공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성공한 반란은 반란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일 게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승자의 자기변명의 기록」일 뿐이라는 역사 회의주의자의 자조적인 말에 동조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5·16이나 12·12는 이른바 「구국의 혁명」이라고 운위되다가 최근 들어 「쿠데타적 사건」 혹은 「군사반란」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조반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
큰아버지뻘인 광해군의 왕위를 빼앗은 조카 인조의 반정에 대해 광해군의 부인 박씨는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도모인가. 아니면 그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역적모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핵심을 찌르고 있다. 1961년 5·16 때 박정희 소장은 『인조반정 때 인조의 심정으로 혁명을 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그의 생각을 교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인조반정에 대한 역사의식이나 역사철학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당시 국내와 국제질서의 혼란 속에서도 내치와 외교에서 훌륭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세자의 신분으로 분조(分朝·위기시 임시로 두었던 조정)를 이끌고 종횡무진 활약해 결국 임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 즉위 후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많은 토지를 개간하여 복구하였고 다행히 풍년도 거듭되었다. 그리고 궁궐을 복구했고 변방의 요새를 튼튼히 하였으며, 군대의 양성을 서둘렀다. 이밖에 문화사업을 강화하여 광범위한 문화재 파괴에 대해 이를 복구하고 많은 서적을 복간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책들을 중요시하였고, 유명한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도 이때 간행됐던 것이다.
인조반정 때는 처음엔 개혁을 실시하는 듯하다가 채 두달도 못돼 기존의 관리들인 훈구파와 왕실의 친인척인 척신 등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이러한 점으로 봐서 반정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반정 후에 오히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능가하였고, 국제 정치질서에서 현실감을 상실함으로써 두 번의 호란(胡亂)을 당했고 그 결과 민중을 이민족인 청나라의 칼날 아래 내맡겼다. 또한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일당전제(一黨專制) 정치는 철저히 기득권층을 옹호하여 반(反)민중적으로 흘렀고, 그보다 심한 외척의 세도정치가 이어져 나라가 결국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한일합방 때 매국노(글자 그대로 일본왕에게서 작위와 돈을 받았다) 76명 가운데 67명이 이들 노론과 왕족외척들이었으니 나라에 끼친 폐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 후손은 아직도 건재하고 이완용의 증손자는 땅을 찾는 현실이다.
광해군의 위민정책과 인조반정의 反動性
바로 이들 서인-노론에 의해 정인홍은 더욱 철저하게 폄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에 의해 망하자 민족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애쓴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우리의 역사 인물 가운데 「세명의 걸출한 인물」(三傑)로 육군의 을지문덕, 해군의 이순신, 정치에서 정인홍을 꼽아 새롭게 평가하였다.
조식의 명망이 알려지던 조선 중기 중종 말년에서 명종 년간 당시는 조광조의 왕도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고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훈척파들에 의해 정권이 농락당하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식의 엄정한 「출처」의식은 바로 우국애민사상으로서 현실비판과 나라사랑에 직접 연결된다. 「출처」란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에 머물면서도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실천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인 정인홍은 조식의 「행장」(行狀·일대기)에서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그 행사의 득실을 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스승의 말을 전하였다. 정인홍은 다시 『선생께서는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라고 하여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즉 조식의 출처사상은 『주역』(周易)에서 말한 대로 「임금(王侯)에게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그 하는 일이 고상하여(不仕王侯, 高尙其事) 많은 후세 사람들에게 출처대의를 깨닫게 하였다」고 보았다.
조식은 김굉필과 조광조의 학문과 그 실천적인 사림의 모습에는 존경을 보이면서도 출처문제에 대해서는 선견지명의 부족과 경험미숙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제갈량에 대해서도 대업을 이루기 불가능한 시절에 출사하여 민중을 어육(魚肉·짓밟혀 결단나게 됨)이 되게 했다고 평가했다. 또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인해 왕이 추방되고 시해되는 상황에 참가, 공신이 되고 끝내 사퇴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비판하였다. 다 아는 것처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과 「폐가입진」(廢假立眞·거짓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을 세움,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운 사건)이란 구실을 내세워 쿠데타를 행했다. 이와는 달리 조식은 고려말선초의 길재(吉再)에 대해서는 논전(論傳)을 짓고 그 출처를 인정하고 있다.
무릇 학문을 하는 자가 이 출처에 분명하지 않으면 바로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왕과 조정에 학자의 양심과 명예를 팔아먹는 꼴이 되고, 나아가 민중과 세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에 군림하는 비리와 악의 무리에 동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못하여 민중으로부터 원망을 듣는 정권일수록 지조있는 학자를 끌어내어 그들의 정권에 참가시키려 한다. 그것은 바로 비판세력을 무마하고 또 학자를 우대한다는 미명하에 그 학자의 재야적 명망을 퇴색시켜 버리고 끝내 올바른 비판세력마저 잠재우기 위해서다.
전·노 두 전대통령과 정치군인들이 정치 비자금 문제와 「12·12 군사쿠데타」·「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살문제」로 지금 감옥에 있고, 최근에는 정치권에서 그들에 대한 사면문제가 거론되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당시 그 정권에 참여한 학자들의 출처는 관심있는 문제다. 본분을 망각한 정치군인들을 이론이나 정신적으로 지원해 온 어용교수나, 총리장관으로서 노골적으로 정권에 참여하여 그 정권을 지지한 학자출신 관료들도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왜 정치군인들만 재판대에 세워야 하는가.
그렇다고 관련 학자들을 모두 재판하고 처단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정치비리나 사이비 학자관료들을 비판하는 통과의례가 있어야, 「민주화 운운」 하는 현재의 대명천지에 다시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매스컴에 나와 국민의 귀를 더럽히고 나라를 오도되舊?못할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책무와 출처대의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것을 모르고 지식을 팔아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일찍이 조식과 정인홍이 당시의 영예와 벼슬이 높았던 이들의 출처와 학문경향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어 말한 대로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하는 것이고, 「이익을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嗜利無恥)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한편 당시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여 당대의 두 쌍벽이며 국가원로인 조식과 이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조식은 그의 상소문(「戊辰封事」)에서 중앙조정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나 공물의 폐해와 함께 서리의 횡포를 날카롭게 지적·비판하여 이를 제대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지경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비해 같은 시기에 올린 이황의 상소문(「戊辰六條疏」)은 현실에 대한 진단과 비판 그리고 개선책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이전의 법과 제도를 함부로 고쳐서는 안되고 개혁적인 신진인사의 등용이 혼란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의 도심과 인효(仁孝) 등 전통예교와 윤리강상에 대한 이야기와 왕의 마음가짐 그리고 이단(異端) 배척에 강한 관심과 주장을 하였다.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찍이 맹자도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였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先富後敎)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도의(道義)가 행하여지는(있는) 세상(나라)에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도의가 행하여지지 않는(없는) 세상(나라)에서 부귀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요즈음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우리네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소수의 부귀한 사람들이나 혹은 다수의 빈천한 서민들이 부끄러워해야 할지 시쳇말로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러한 사회풍조에서 우국정신과 나라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 정인홍이 말한 대로, 「아래 사람(民衆)을 착취해서 위에 있는 사람을 살찌게 하는 자를 유능한 사람으로, 물건을 아끼는 자는 현실에 어두운 사람으로, 나라 사랑하는 자는 미치광이로 지목하는 습관에 물든 지 오래되었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니 외국 오랑캐가 쳐들어 와孤?알지 못하였다」고 한 그대로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경제적 급성장과 아울러 앞으로 21세기 미국과 패권다툼을 전개할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철학자 B.러셀이 1920년대 중국 전국의 유수한 대학을 1년 가까이 순회강연을 하며 말한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한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중국의 「신중화주의」에 맞물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도 거론되고 있다. 일본은 바로 몇년 전에 평화유지군(PKO) 법안을 통과시키고 다시 「세계평화」를 운운하며 일본군대의 해외파병을 서두르고 있다. 일제 말에 군국주의자들이 떠들던 이른바 「대동아공영뎠퐈뮌犬?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른바 「동양평화」, 그리고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방자하게 떠든 「정명가도」(征明假道) 등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역사 이래로 중국과 일본이 통일되고 강성해졌을 때 국가의 운명과 안정이 심상치 못하고 항상 고통과 질곡에 휩싸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나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비극을 다시 당한다」는 말에 경각심을 가지고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
「재물을 모으면 사람이 흩어진다」
조식은 상소문(「乙卯辭職疏」)에서 외교와 국방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당시 상황과 대처방안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쓰니(당시 문정왕후 등 훈구척신파나 왕조말 민비와 그 민씨정권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재물은 모이겠지만 백성은 흩어져 결국에는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 없고 성에는 군졸이 없다. 적이 침입하여도 무인지경이 되었으니 알 만하다」며 당시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구의 국경침입과 변란이 심상하지 않음을 경고하였다.
한편 조식의 왜곡부패된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과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려는 열망은 정인홍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정인홍은 상소문에서 「오늘날 형세는 사람이 중병에 걸린 것과 같다. 안으로 벼슬아치들의 도적질이 만연했고, 이후 바깥으로부터 무기를 든 외적이 침략했다」라고 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연전연패하던 시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58세의 나이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3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빼앗긴 성과 주둔지를 습격하여 탈환하는 교란작전을 펴고 연전연승했다. 이때 올린 위의 상소문은 조정에 대한 비판질타와 정치개혁 논의를 담고 있어 그 실천성과 함께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마침내 이긴 전쟁으로 이끈 실질적인 세력은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인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수군과,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곽재우·김면 등 57명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의병이 주축이었다. 그밖에 당시 분조를 이끌고 나라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약했던 광해군의 공은 그 누구보다 먼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밀리긴 하였지만, 왜군에게 한치의 땅도 할양해 주지 않고 끝내 바다건너로 물리칠 수 있었다.
한편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명분 하에 파병한 데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명은 국방을 위협하는 왜군을 조선과 함께 조선 내에서 격파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조선-일본이 합세한 군대가 쳐들어 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당시 정황을 보건대 만약 전라도가 함락되고 서해안이 뚫렸다면 왜군은 군량미도 확보하고 무엇보다 왜의 수군은 황해와 발해만을 거쳐 북경의 외항인 천진으로 공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또 만약 한반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까지, 또 허허벌판인 랴오뚱반도를 지나 북경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초기 왜군의 파상적인 공세가 있자, 평양으로 피신한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자는 이항복의 주장과 명나라 군대에 대한 또다른 우환을 염려한 윤두수의 신중론도 있었다. 이러한 우환은 실제로 나타나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에서 말한 대로 당시 민중들은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나라 군사는 참빗이다」고 할 정도로 명나라 군사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다. 그래서 정인홍도 상소문(「辭義將封事」)에서 「명나라의 군사적 후원은 잠깐으로 그쳐야 할 것」이라며 자주국방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유학」은 「사람에게 필요한 학문(人+需)으로서 실학을 뜻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실학일 때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실질·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의미 하다.
학문은 철저하게 국민을 바탕으로 공공성 지녀야
그 실학사상의 내용으로 정치의 공공성과 민본사상 그리고 제도개혁을 들 수 있다. 일찍이 정인홍은 「국가의 일은 일개 한 가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하였다. 즉 국가 권력의 소재와 행사는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민본을 바탕으로 하는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조식의 연결고리는 조식의 고제자인 정구(鄭逑)의 말년제자 허목(許穆)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정구는 조식과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허목은 이러한 정구의 학통을 상속했다. 그뿐 아니라 조식의 실학적 학풍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조선 후기 근기 실학파를 형성시켰다. 실학파의 거두인 이익(李瀷)과 그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허목을 통해 조식의 경세사상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받았다.
즉 조식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용상 유사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경제 문제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조식과 정인홍의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과 이익의 「장리론」(贓吏論)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鄕吏論)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모두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개정해야 함이 당연한 이치라고 본 일종의 변법사상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리고 실학파의 부국강병책으로 제시되는 균전적인 「한전론」(限田論)이나 「여전론」(閭田論) 그리고 병농일치적인 「부병제」(府兵制) 등은 이 주장들에 관심을 두고 문무(文武)에 대한 비중을 국가가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남명학파의 논의주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익은 그의 「퇴계조식」(退溪南冥)론에서 조식에 대해 「그 천길 벽이 우뚝하게 서 있는 기상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고 적시하였다. 또한 이익은 「경서(經書)를 연구함은 장차 치용(致用)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해석하면서 천하만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갖 책을 읽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이황의 글은 본래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政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 법령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이기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時務)의 큰 것을 대략 말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의 「진리란 바로 현실과 정치에 있다」(道在政事)는 담론을 새롭게 여길 때 실학사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위기 때마다 의로운 행동으로 이어져
조식의 평생 지우였던 성운(成運)은 조식의 묘비문(墓碑文)에서 당시 「조식의 깊은 학문과 높은 의리, 실천적인 유학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며, 오히려 평판이 사실과 다름을 개탄하고 백세 먼 훗날 아는 이가 나와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은 이후 경상우도 지역에서 면면이 발휘되었다. 조식을 사숙하고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병자호란 때 의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무신란(1728년)과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1862년) 등이 이 지역에서 발발하였다. 무신란과 임술농민항쟁은 노론의 일당전제와 외척세력에 의한 중앙조정의 부패한 정치와 왕위계승 비리,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에 대한 지나친 차별대우, 민중에 대한 탐학 등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또한 3·1운동이나 독립만세운동 등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운동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곳이 바로 이곳 진주와 합천 삼가면이었다. 그리고 천도교·기독교·불교대표 33인 중심의 3·1 만세운동과 병행하여 유교에서는 유림대표 1백37인이 중심이 되어 당시 제1·2차에 걸친 「유림단 사건」(儒林團 事件·巴里長書 事件)이 일어났는데, 그의 중심지가 이곳 경상우도로서 그 총대표자였던 곽종석(郭鍾錫)과 그 제자였던 김창숙(金昌淑,心山)과 김황(金榥) 등이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자 제자인 김우옹(곽재우의 손위 동서)의 13세 종손인 김창숙이 일제시대 독립운동 거두로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3년간 감옥살이와 고문에 의해 앉은뱅이(그래서 나중에는 호를 벽옹이라고도 하였다)가 되고, 해방 후 이른바 「황도유림」(皇道儒林)이라 불리는 친일파를 성균관에서 쓸어내어 민족전통대학인 성균관대를 새로 복구 설립한 것도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창숙은 신채호·이회영과 더불어 이른바 「북경삼걸」(北京三傑)로서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반대해 무장항쟁을 주장하여 국내외에서 일제에 대한 무장공격(테러)을 지휘하고 그 자금을 모았다. 그는 이승만의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당시 국가원로로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에 의연하게 맞서 그 독재와 부패비리를 꾸짖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김창숙을 성균관장과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이러한 와중에 그는 집도 없이 여관생활을 하며 쓸쓸히 임종을 맞았다.
조식의 의기사상이 전수된 진주에서 이후 일제시대 때 백정들의 신분타파운동이었던 형평사 운동이 벌어진다. 또 4·19혁명이 마산의 3·15의거에 의해 촉발된 것과 부마민중항쟁으로 인해 유신정권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보인다. 즉 우리 역사에서 국난과 국가의 위기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타협없는 불굴의 의리정신은 남명학파의 특질에서부터 이 지역에 살아남아 역사적으로 면면이 이어져 온 때문이라 생각된다.
■ 사진설명
①합천군 가야면에 소재한 부음정.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이 즐겨 노닐던 곳으로 알려졌다. 조식이 폄하됐던 원인중에는 인조반정을 시도한 서인들이 정인홍을 날조·왜곡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연유된 바 크며, 따라서 정인홍의 재조명은 조식의 재조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② 조식의 제자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시 왜적을 맞았던 창녕의 화왕산성. 석성 둘레가 2.6km, 우물이 9개, 연못이 3개로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산성이었다. 산성 안쪽에 창녕 조씨가 성씨를 얻었다는 득성지가 있으며, 화왕산 정상에는 억새풀이 장관을 이룬다.
③ 조선시대 도산·옥산서원과 더불어 3산서원의 하나로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던 덕천서원의 원임록. 채제공 등 쟁쟁한 인물들이 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전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씨가 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