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암의 48세가 되던 해, 모친의 상을 당하여 모든 벼슬과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3년상을 치루었다. 그해는 래암과 절친하던 이이(율곡선생)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그는 이로부터 10년간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52세때 익산군수로 봉해졌으나 사임을 청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고, 이 상소문, 辭益山郡守封事(사익산군수봉사)에서 왕의 취사불명의 정책등을 지적하고 왕으로 하여금 강학의 공을 돈독히 하고 정심으로 조정의 시비를 분명히 하여 정책의 취사를 바르게 할 것과 사류의 폐단과 조정의 안일무사주의에 대한 개혁을 촉구하였다. 래암 정래암이 조정을 물러 나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東人과 西人의 分黨 소용돌이는 더욱 격화되고 이를 조정하는 데 앞장섰던, 이이(율곡)도 東人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 나왔고, 그 뒤 1584년에 세상을 뜨자, 동인과 서인으로 완전히 분렬된 정치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래암의 益山郡守辭職?(익산군수사직소)와 함께 진달한 시국안정책은 개인의 영달보다 국가를 위한 시의적절한 정책건의 였던 것이었다.
래암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합천에서 ‘山林掌令(산림정승) 來庵先生(래암선생)’이란 영남선비들의 존경을 받으며 南冥(남명) 曺植先生(조식선생)의 高弟(고제)로서, 학자 선비로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1592년, 래암나이 56세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래암은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래암이 의병을 모집하자, 영남지역의 재야 선비, 젊은이들은 구름같이 래암의 휘하로 들어와 속속 의병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래암에 대한 영남선비들의 학문적 존경과 그의 “山林掌令 來庵先生”이란 사회적 큰 영향력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임진왜란 중, 전쟁 초기부터 끝까지 싸워 이긴 실질적인 세력은 李舜臣(이순신)과 元均(원균)의 연합함대인 慶尙右水營(경상우수영)과 全羅左水營(전라좌수영)의 水軍(수군)과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각 지방의 義兵(의병)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시대적 배경에서 경상우도와 이 일대는, 남명 조식선생의 실천적 學風(학풍)을 이은, 鄭仁弘(정인홍)의 영향력은 의병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有史(유사)이래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최대의 군사동원으로 이 민족과 이 강토를 짓밟고 유린한 전쟁이었으나, 끝내 우리는 그들을 물리쳤고 비록 戰場(전장)이 우리 나라였던 관계로 피해는 컷 지만 한치의 땅도 내어주지 않고 바다 저쪽으로 쫓아버린 이 전쟁의 역사적 교훈은 소흘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국난의 전쟁에서, 우리는 크게 몇 가지로 전쟁의 승리 요인을 요약할 수 있다. 경상우도 의병의 중심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합천 의병의 눈부신 활약, 수군인 이순신과 원균의 남해안에 대한 철통같은 방위, 그리고 관군의 임진왜란 삼대첩(한산도, 진주, 행주)과 권율의 이치대첩 등으로, 우리 나라 서해안 평야지대를 끝내 방어하여 곡창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우리 군사와 援軍의 軍糧米 조달에 차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 승리의 큰 요인이었다.
또한, 이것은, 왜군에게는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의 수송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즉, 보급선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왜군은 보급과 수송을 위해 전방병력을 후방에 배치하고 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전력의 분산과 낭비를 초래하여 왜군 스스로 강화를 우리에게 제안해 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왜군을 남해 바닷가로 후퇴케 하여 울산에서 사천성에 이르러 농성하는 데 그치도록 하였고 끝내는 일본으로 도망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정예 관군이 아닌, 이 시기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의병의 활동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실질적으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1592년, 합천에 거주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56세의 ‘山林掌令’ 鄭仁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진년 5월 10일에 金沔(김면)과 함게 陜川(합천)의 崇山洞(숭산동)에서 회합하여 同志之士 들인 郭?(곽준), 河渾(하혼), 權瀁(권양)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경상우도 57인의 의병장들은 대개 경상우도에 散在(산재)되어 있던 曺植(조식)과 鄭仁弘(정인홍) 門人(문인)들로 주축을 이루어 倡義하였다. 이에는 물론, 곽재우도 포함되어 있었다.(주: 홍의장군 곽재우는 조식의 門人임)
정래암은 합천 의병군 삼천여 명을 槍兵, 射手, 騎兵으로 조직적인 편제를 하여 거느리고 무과출신으로 무용이 뛰어나고 부산첨사를 지낸 孫仁甲이나 거제현령 金俊民 등을 中軍이나 中郞將(中衛將)으로 삼아 주로 陜川, 高靈, 星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정래암은 스승 曺植으로부터 받은 兵法공부와 그의 뛰어난 戰略과 여러 가지 신출 기몰한 전술로 경상우도 8-9 郡縣을 왜군의 노략질에서 보호하였다. 구체적으로는 茂溪, 洛江, 安彦驛의 三次에 걸친 戰勝과 晋州城 대첩 때 성밖에서 구원하였고, 丹城에서 포위된 호남 의병장 崔慶會 軍의 구원, 3차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끝내 星州城을 탈환하는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宣祖 25년인 壬辰年(1592년) 6월 5일 고령 茂溪전투 승리는 낙동강 水路를 통한 왜군의 보급부대의 통로를 차단하고 초기 의병장들에게 승리감을 가지고 창의하는 동기를 주었기 때문에 壬辰 戰亂史에서 특기해야 할 대첩이다.
한편 明나라의 援兵이 오기 전에 관군이 연전연패 후퇴를 거듭하던 전쟁초기에 적의 후방이었던 경상우도 宜寧에서 忘憂堂 郭再祐는 4월 22일 義兵을 倡義하였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영남일대의 선비들의 존경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창의된 의병대장인, 56세의 정래암과 연락을 취하고 래암의 지휘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호남에서는 高敬命, 金千鎰, 경상좌도에서는 權應銖가, 호서에서는 趙憲 등이 起兵하였다 . 이러한 의병들의 활약과는 다르게 당시 官軍이 처음에 패주를 거듭한 원인이 倭賊의 형세가 大兵이었고 鳥銃 등의 신무기를 휴대하였다는 것과 이전과는 다른 전략 전술상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거론될 수 있으나, 그 보다도 당시 우리 나라 軍隊의 紀綱이 해이해져 초전부터 전쟁의 기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전선의 장수역할을 하는 지방수령 들이 民衆들에게 평소의 가렴주구로 인해 인심을 크게 잃고 있었던 데서 관군을 도와 싸움을 더불어 하지 못한 데에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鄭仁弘의 상소문에서 지방수령들의 민중에 대한 평소의 탐학과 중앙의 조정대신들에 뇌물로 인해 피폐된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처음 曺植의 제자들이 유교 정치사상의 강한 실천의지로 義兵倡義를 했을 때 관군들은 오히려 의병장들을 역적으로 모는 등 서로 불화하고 있었다. 물론 관군마저도 지방의 守令이나 節度使가 大兵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조선전기의 制勝方略 체제였고, 私兵의 모집이란 바로 逆謀와 통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내적 위험에서 연전연패의 관군과 강한 일본군대를 상대로 한 起兵이란 죽음을 각오한 慷慨한 義에 대한 실천의지가 없고서는 곤란한 문제였다. 특히 곽재우와 김면이 만석군 집안으로서 처음의 그들 의병들은 家奴들이 많이 포함된 반면, 당시 56세의 鄭仁弘은 바로 당시 학덕과 명망으로 그의 문인을 중심으로 많은 의병이 모여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주도한 義兵軍의 이러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전과는 낙동강에서 敵의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여, 보급이 끊어진 왜군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경상좌도와 우도의 아군이 상호연락과 합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륙 깊숙히 들어온 敵을 고립시키고 호남으로의 진출을 차단하여, 비록 막대한 피해는 입었지만 끝내 왜군을 퇴각시킴으로써, 壬辰倭亂을 이긴 전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壬辰倭亂의 생생한 현장기록을 담고 있는 慶尙巡營錄에서도 “戰勝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軍功은 남의 끝에 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서 仁弘이 첫째다” 라고 한 데서 그의 선비적 기질과 剛義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시 관군들 대개가 軍功을 다투어 서로 질시하고 전쟁수행에도 영향을 미쳤던 일에 비춰보면 단순한 개인적 성격의 참모습에 더하여 曺植의 영향을 받고 修己治人적인 來庵의 정치사상이 修己부분에 매우 철저하여 바로 治人부분의 참다운 형태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鄭仁弘은 丁酉再亂 때에 아무도 倡義하지 않았을 때에도 唯一하게 義兵을 모집하였고, 明나라 將帥들 마저 그를 戰亂 가운데서 최고의 功勳者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병 倡義와 수훈 등의 결과로 ‘嶺南義兵大將’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전쟁중 외아들을 잃었고, 또한 이를 사직하면서 올린 辭義將封事?에서는 유교정치사상 고유의 經世와 義理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현실을 直視하고 實用的 變通과 時宜에 맞는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진단하였다. 래암은 이 辭義將封事에서 약 5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올려 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고 그 전쟁을 감당 못하고 혼란에 휩싸인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국가를 재건하는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것을 요약하면 1. 왜란은 왜 일어났는가? 왕은 무엇을 잘못하고 조정은 무슨 결함을 가졌는가 깊이 그원인을 검토해야한다. 衣冠之盜(의관지도: 공직에 있는 자의 도적질,부패)가 있은 연후에 밖에 千戈之寇(간과지구: 방패과 창을 든 도적,왜구)이 되어 쳐들어 온다. 2. 편당을 좋아하고 법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가나한 자는 못난 사람이요, 백성을 착취해서 나라만이 살찌게 하는 자를 명관으로 알며, 물질을 아끼는 자를 바보로, 나라를 사랑하는 자를 미치광이로 취급하여 그것이 오래됨에 당연한 것 같이 되었으니, 도적이 쳐들어 오지 않을리 있겠는가? 3. 그러니 나라 안이 싸우다 무너진 것이지, 海賊이 스스로 이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러들인 꼴이요, 풍신수길이 강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방비가 없어서이다. 4. 明軍은 멀리서 왔고, 我國은 군량이 부족하다. 그러니 明軍에 의존하는 것은 잠시여야지 오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아니다. 시급히 나 자신의 믿을 수 있는 것을 구하여 영구한 길을 도모하라. 5. 時勢가 약하면, 治制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郡縣을 합치고 大陣을 두어 양사를 선임,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할 것이며, 명나라에 전실을 솔직히 밝히고 널리 은리를 열어 백성들로 하여금 채취케 하려 관시통화케 하면 재정에 여유가 생겨 명군이 오래 주둔한다 해도 물자를 멀리서 수송해 오지 않아도 될 것이며, 빈민들도 농경에 자하여 이 어려운 형편을 조금이나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병을 조직하고 여지는 돌려보내며, 엄히 징포를 금하고 외진의 명을 회복하며, 민중을 아끼고 물자를 잘 관리하는 수령을 임명하며, 무사중 군공이 있는 자를 경직에 두어 군정과 군비를 정비 강화해야한다.
래암이 영남의병도대장의 織을 사임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직언으로 상소한다. 이와 같은 상소문은 왕으로서는 듣기 어려운 직언이다. 그러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의병대장의 제수에 사임하는 래암에게 原從功臣에 錄하고 通政위계에(通政大夫의 관작급)올려 濟用監正, 상주목사, 영해부사등 벼슬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벼슬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상소문에서, 같이 의병활동에 참가했던 동지들 중, 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응분한 恩典이 있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래암은 상소하기를 “倡義討賊한 사람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全致遠, 이대기. 전우, 성주. 고령의 문려 , 이홍우, 이부춘, 김응성, 박정완등인데, 나와 곽재우 등 몇 사람은 이미 벼슬을 받아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니 국가의 전란시에 의병을 모아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백수궁향에 있으면서도 적과 싸워 나라를 지켰다. 조정에서 상을 내린다면 당연히 이 사람들에게 내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래암은 이러한 상소를 통하여 의병의 사기를 더 높이고 전투력을 강화하였으며, 앞의 辭義將封事를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국방정책, 그리고 올바른 정책을 촉구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래암은 아래 사람을 착취해서 위에 있는 사람을 살찌게 하는 자를 유능한 사람으로, 물건을 아끼는 자는 迂闊한 사람으로, 국난을 맞아 나라 사랑하는 자를 미치광이로 지목하는 습관에 물든지 오래 되었다고 당시 사회정치현실을 비판하였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니 外寇가 쳐들어오는 데에 이르러도 알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鄭來庵은 바로 당시의 국가의 병을 임진왜란 20여 년 전에 지방수령으로 있을 때(39세 때인 1573년 黃澗縣監으로 재직할 때)는 당대 최고의 善政을 베푼 지방관으로 뽑혔고, 그리고 중앙관직인 사헌부 장령에 있을 때(46세 때인 1582년으로 임란 10년전)는 현실비판과 아울러 구체적인 개혁정치를 몸소 실천하였고 임진왜란이 났을 때도 앞에서 살펴 본대로이다. 그러기에 ??宣祖實錄??에서도 “鄭仁弘은 非理를 탄핵하는데 있어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국법을 엄하게 지켜 일시에 紀綱이 자못 肅然하였다.” 라고 史官도 評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앞서 있었던 己丑士禍에서 최영경을 무고하게 죽게한 것과 왜군과의 화해론을 주장한 서인과 남인들 가운데 특히 成渾에 대한 잘못을 탄핵하여 삭탈관직하였다. 또한 선조 말년에 정래암을 대사헌에 임명하자 정철과 성혼에게 붙어있던 이귀 등은 성혼 등을 옹호하고 정래암을 모함하자, 선조는 이를 단호하게 배격하면서 성혼의 죄를 논핵하고 나서 “네가 감히 정인홍을 배척하여 모함할 계획이나 래암의 사람됨은 禽獸와 草木도 다 그 이름을 아는 바다” 라고까지 하였다.
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장으로서 중요한 전략적인 勝捷의 공으로 亂後에 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宣祖 35년 68세로 大司憲에 기용되었다. 光海君 때에는 산림정승으로, 정치의 정신적 지주로, ‘大老’로 추앙을 받았고 수십 차례 정승에 제수하고 사직하고를 거듭하였다. 일찍이 우리 역사학의 개조인 申采浩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政治에 래암 鄭仁弘을 꼽았다.
만약, 이 시대의 역사를 편협한 시각에서 벗으나 올바른 재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진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혼신으로 살다간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조선왕조 실록. 역사 교수들의 논문집 참고.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