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瑞山鄭氏의 24代손으로 相자 永자의 막내아들입니다.
아버님이 별세하시고 몇 번이나 서산에 방문을 하였지만. 회한의 눈물을 울었지만 한없이 울고 온지는 저의 짧은 생에 처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 묘앞에서 불효의 눈물을 흘리고, 고향집 시제의 대청마루에서 시조의 영정앞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서울에 올라 왔습니다.
제가 고향의 집 대청마루에서 밤을 지새운 것은 군대 영장을 받고 1985. 7. 23일 밤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날 군입대을 앞두고 고향의 친구들과 아쉬움을 하고 다음날 조치원훈련소로 떠나던 날 대청마루에서 같이 생활하던 할머님과 어머니와 헤어지고 그후에는 가족이 같이 생활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1984년 저의 아버님은 채무로 인하여 저의 아버님의 위치가 제자리에 서지 못하셨고, 저 또한 어린 나이에 부정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에 지금살아 계신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을 하면, 큰마음의 아버지가 계셨음을 깨달았습니다.
1982년 아버님은 시조님들의 해가 될까, 50년을 시조님을 집에서 서산에 생활하시는 정두영 아저씨에게 인감증명등을 내어 놓으시고 서산 고향땅을 떠나 버리셨습니다.
그후 홀로 할머니 어머니, 각각의 생활을 하시고, 그 후 큰형님이 집안의 충격으로 사망하시고, 둘째 형님마져 월남에 가서 전쟁의 후휴증으로 술을 마신다 하지만, 집안의 마음고생으로 술을 좀 드시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후 할머니는 주위에 맴돌다 객사을 하셨습니다.
집안이 말 할수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후 종친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하였습니까.
그 후 25년이 흘러 지금의 서산 고향의 집 시묘는 어떠합니까
농사를 지어서 시제에 모시던 분들이 3번이나 바뀌었고
주위의 환경들이 파괴되어 고풍스러운 모습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태풍피해가 있었다지만, 전에 아름들이 살구나무, 지금도 생각하면 큰 호두나무, 감나무등 무수히 많이 있었는데 농사에 피해가 된다하여 모두다 잘라버렸습니다)
지금은 썰렁하니 빈집으로 남아 흉물스러운 집으로 변하였 습니다.
시제을 모시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나 봅니다.
그러나
저희 증조부부터 4대에 걸쳐 정성껏 모시고 주위의 환경을 가꾸고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1983년 여름. 성연면 소재지 다리 밑에서
어린 나이인 저와 서산에 계신 정두영 아저씨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일시적 방황이고, 선대에서부터 이곳에서 살아계셔 시조를 위하여 살아서 아무 재산도 없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갈곳이 없으니, 시제 땅에서 계속생활을 하게 하여 달라고 눈물의 하소연 하였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그 후 서산에서 생활을 하셨지만, 정두영 아저씨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로의 화해의 말 등 내통을 전혀 하지 않고 남남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2010. 5월 오사리에서 나무 한그루라도 심었으면 좋겠다, 말씀하여 느티나무(할아버님은 서산의 산마루에 느티나무을 심어 아직도,늠늠하게자라고, 오사리에도 떳떳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을 한구루 함께심어 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적 살던 집으로 가자하여, 텅 빈 집으로 가보았습니다.
대청마루에 놓인 영정앞에 절을 하고 그 깐깐하던 아버님이 통곡을 한참이나 하시고, 난 불효자다, 서산정씨에 욕을 보였다, 하시면서 한 없이 또 다시 통곡을 하시었습니다. 텅빈 대청마루에서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해동제의 간판과 위선기등을 내가 조각하여 만들었다, 사진을 찍어 두어라 말씀을 하여 실행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10년전에 찍어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자 보존을 잘해라 하여,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모습이 생각나 같이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전의 사진과 비교 하던중,
인터넷의 대종회등을 두루 살펴 보았지만 鄭敬九 증조부의 이야기는 한 줄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산정씨의 시조의 땅이 있다는 사실들에 대하여 종친님들이 더 널리 알려 지기 시작한 것은 1985년이후라 생각 듭니다.
그전의 산지기가 누구이고, 관리 일들에 대하여선 모르고 있습니다.
증조부께서는 김천 대덕면 조룡리라는 곳에서 먼 서산의 시조의 묘을 찾기위해 단신으로 올라와 대법원까지 판결하여 시조의 묘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종친님과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조의 묘 맨 끝자락에
썽렁한 묘 그것이 전부이지요
비석도 방치되고, 묘의 묘비도 세우지 못하게하고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분이 없었으면 서산이 시조의 묘가 어디에 있던가를 알수 없을것입니다. 망운대비, 부석소재 향교서원등
저는 서산이 고향인데, 왜 할아버지는 경상도 김천일까(김천으로 제사를 모시러간것이 생각나)의문을 같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증조부의 고향이 김천으로 대덕면 조룡리를 방문하였습니다.
무척이나 산골로 포기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가, 종친을 만난적이 있는데 무척이나 반가워하시고, 서산정씨는 다 친척이다 라며 방으로 서습없이 들어오라 하여 ,대접을 받고. 그리고 증조부에 대하여 좀더 알고 서산정씨의 내력을 조금듣고 왔습니다.
그후 50여일간 병원에 계시다 올해 9. 12일날 별세 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여도 한번도 찾아오지 않으신분이 정두영 아저씨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아저씨가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할말이 많이 있는데 라고. 그 말씀만 하였습니다.(할 말 무슨말인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아버님은 병상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나쁜놈들, 나쁜놈들 이라 하시면서
한전에서 심어놓은 전줏대가 조상의 묘 머리를 지나가고
조상의 묘을 파헤쳐놓고,
우청룡 좌백호를 만들기위해 할아버지가 희사 하신 산도 팔아버렸다. 하시면서
지키지 못한 나는 불효자다라고 하면서 그저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나 죽고 서랍을 열어 보라 회고록이 있다, 라 하여
후에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이야기도 있었지만, 다시금 느끼게 하였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6.25때등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시조의 땅이 서산정씨 종중회라고 표기를 하였지만 위토개혁이 있어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님이 시조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를 새삼 느끼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살아생전 말없이 제사의 상을 올리셨습니다. 그후 1982년에는 종친회에 아무말이 없었습니다.
또한 저희들도 아버님이 있어 말없이 지켜만 보고 바라만 보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종친의 땅은 지켰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텅빈 시조의 집, 마구 훼손되어진 주변의 환경
명목상 시조의 집근처의 땅을 매입한다고 팔아 버린 산
나중에 알고 보니 복지사업을 한다고 매입을 하였다는 엉뚱한 말들(시조의 땅에 건물을 지어 그 수입금으로 종친회비를 쓰면 그것이 더 좋은 복지사업 이지요)
시조의 종토목록에 전 604. 607번지가 없어져 버렸는데 그 등기의 이전 내역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 당시 종중의 대표자로 되어야 하는 데, 개인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후에 종토 목록 만 올라 있다 팔아 버렸습니다.(등기소에는 나오지 않지만, 법원의 등기소에 가면 구등기 명의의 변동 사항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식들이다 라고 말을 할지 모르지만 저희들은 종친회에서 하는일에 대하여 이유를 달지 않고 종친회에서 하는 일은 선친들이 하는 일이라 생각을 하였습니다. )
서로가 존중을 해야 서로가 존중을 받듯
서로 비난을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저 또한 분개를 하고 있습니다.
덜도 말고, 보탬도 없이 있는 그대로만 기록하고 보존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산 96-2번지, 지금의 변경되어진 658-5번을 회수 하여,
후에 후세들이 출세을 하고 시조의 묘 앞에 당당히 절을 올릴 수 있도록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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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5.
鄭 璣 德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