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寅 16年 (1290년)
1월에 왕은 원나라에 가 있었고, 일본 왜적의 침입이 있었다. 그리고 내안의 합단군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에 참의찬성사 홍자번과 판밀직사 정가신 등이 군사를 병부에서 훈련하고, 안전으로 경상도 도지휘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전라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무진에 첨의참리 송분으로 충청도 도지휘사를 삼아 대책을 세웠다.
2월 을해에 중군 만호 정수기를 보내어 금기산동에 주둔케 하고 좌군 만호 박지량으로 이천에 주둔케 하며, 한희유로 쌍성에 주둔케 하고, 우군 만호 김흔으로 환#(고성지방)에 주둔케 하고, 나유로 통천에 주둔케 하여 합단적에 대비하였다.
3월 임자에 도이첩목아가 사람을 보내와 쌍성에 둔수하였다.
3월에 동녕부를 고려에 반환받았다. 이것은 정인경의 외교적 교섭의 결실이었다.
5월에 합단군이 침입있었다.
7월에 정인경(鄭仁卿)은 서경유수가 되어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합단군과 싸웠다.
8월에 원군을 요청하고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검토하였다.
12월에 지도첨의사사 송빈이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합단군에 패하자,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병하였다. 이후, 서경유수 정인경(鄭仁卿)도 왕의 강화도 피병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지키고자 강화도로 들어와 왕을 지켰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정인경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와 살게되니 이때 부터 사람들이 그 마을을 \'인경리\'라고 하였다.
1월에 왕은 원나라에 가 있었고, 일본 왜적의 침입이 있었다. 그리고 내안의 합단군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에 참의찬성사 홍자번과 판밀직사 정가신 등이 군사를 병부에서 훈련하고, 안전으로 경상도 도지휘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전라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무진에 첨의참리 송분으로 충청도 도지휘사를 삼아 대책을 세웠다.
2월 을해에 중군 만호 정수기를 보내어 금기산동에 주둔케 하고 좌군 만호 박지량으로 이천에 주둔케 하며, 한희유로 쌍성에 주둔케 하고, 우군 만호 김흔으로 환#(고성지방)에 주둔케 하고, 나유로 통천에 주둔케 하여 합단적에 대비하였다.
3월 임자에 도이첩목아가 사람을 보내와 쌍성에 둔수하였다.
3월에 동녕부를 고려에 반환받았다. 이것은 정인경의 외교적 교섭의 결실이었다.
5월에 합단군이 침입있었다.
7월에 정인경(鄭仁卿)은 서경유수가 되어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합단군과 싸웠다.
8월에 원군을 요청하고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검토하였다.
12월에 지도첨의사사 송빈이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합단군에 패하자,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병하였다. 이후, 서경유수 정인경(鄭仁卿)도 왕의 강화도 피병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지키고자 강화도로 들어와 왕을 지켰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정인경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와 살게되니 이때 부터 사람들이 그 마을을 \'인경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