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광해군시대의 내암 정인홍(1535~1623)과 "회퇴변척소"에 대해 현재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광해군 2년(1610년) 3월 21일자 광해군일기에 “한강 정구(1543∼1620)가 친구 김우옹(1540~1603)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시(輓詩)에서 ‘퇴계는 정맥이고 남명은 고풍이다(退陶正脈山海高風)’라고 쓴 것을 보고 정인홍이 대로하여 고풍정맥변을 짓고 정구와 절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구가 퇴계 이황(1501∼1570)을 유학의 정통(정맥)으로 높이 떠받든 반면 남명 조식(1501∼1572)은 인품이 높고 기개가 훌륭하다(고풍)는 정도로만 평가하자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내기이자 당대 유학의 양대 거두였다.
학파나 정파 양쪽에서 정인홍과 반대쪽이었던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제자와의 대화에서 "정인홍이 正脈高風辯(정맥고풍변)을 지었다. 그 글이 참으로 훌륭하니 구해서 볼만하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 부록 14권[어록]에 나온다.
2003년 봄, 경상대 이상필 교수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지명당 하세응(1671∼1727)의 종택에서 ‘경남 서부지역의 고문서’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수많은 문서 중 ‘변무(辨誣·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힘)’라는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던 그의 눈에 어느 순간 ‘正脈高風辯(정맥고풍변)’이라는 다섯 글자가 날아와 박혔다. ...정맥고풍변은 한자 1825자로 구성됐다. ...발굴된 정맥고풍변에 있는 ‘병오추(丙午秋)’라는 표기로 볼 때 정인홍이 이 글을 지은 것은 1606년 가을이었다. 이 글이 담긴 책 ‘변무’에는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에 대한 세간의 억울한 평가를 반론하는 글만 18편이 들어 있다. 누가 언제 왜 필사를 해뒀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 추가 연구가 필요한 문서다. 정인홍은 어떤 근거로 퇴계가 유학의 정통이라는 정구의 말에 반대했을까.
정인홍은 퇴계와 남명 모두에게서 배운 한강 정구가 퇴계를 유학의 정통이라고 표현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정맥이란 속마음과 밖으로 드러난 행동에 이르기까지 道[도]에 어긋남이 없으며, 사람을 대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도 털끝만큼의 私慾[사욕]이 없어야 하며, 그 논설이 모두 스스로의 것이 아님이 없고, 한마디 말도 虛僞[허위]가 없어야 하며,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귀신에게 質正[질정]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어야 바야흐로 聖人[성인]의 正脈에 참여할 수 있다"며 "퇴계가 과연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하는 근거로
"퇴계는 홍문관에 있을 때 봉성군[중종의 8남]을 죽이기를 요청하는 箚子[차자-일종의 상소]까지 올렸다고 그의 제자로부터 들었다. 또 관기를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종신토록 자신의 수발을 들도록 하였다"고 적었다.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 1565]일파가 권력을 잡기 위해 을사사화[1545]를 전후로 봉성군 등 수많은 사람을 무고로 잡아 죽일 당시 벼슬을 내놓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성현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당시 퇴계와 쌍벽을 이뤘던 남명은 벼슬을 할 때가 아니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최근 이를 연구한 이 교수는,
"정인홍은 퇴계가 봉성군을 죽이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을 퇴계의 제자로부터 들었다고 표현을 했지만,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글임을 감안할 때 정치적 학술적으로 큰 반박과 배척을 당할 수 있는 내용을 무심코 적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인홍은 퇴계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같이 모셔야 한다는 당시 유림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회퇴변척소'를 1610년 광해군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문묘대상자로 거론되던 또 다른 인물인 정안 조광조(1482~1519),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일두 정여창(1450~1504) 등은 옳은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강직한 인물이지만, 퇴계나 회재는 봉성군이 죽임을 당할 때 개인의 입지와 벼슬만 지킨 채 그렇지 못했다는 주장이었다.
정인홍은 이 일로 '퇴계'를 따르던 팔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성균관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정인홍과 남명학, 그리고 퇴계학=
'정맥고풍변'을 쓴 내암 정인홍은 1573년 6품직에 오른 이후 1618년 영의정에 오른 북인의 영수다. 또한 산림정승으로 그 학문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임진왜란 때는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성주 합천 고령 함안 등지를 방어하는 등 都義兵大長으로 왜병의 전라도 진출과 보급로 차단의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로인해 임진왜란후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시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에 의해 1623년 참형됐다. 영의정까지 지냈고 나이도 87세인 노인 정인홍을 참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많은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했다.
죄목은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비시켰다는 살제폐모를 그가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 역사학자들은 광해군 시기를 재조명하면서 정인홍이 살제폐모를 주도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 교수는 정인홍의 후손 집에서 '영창대군을 죽일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쓴 상소문을 발굴했다.
이 교수는 "정인홍은 관료 생활을 오래한 것은 아니고 생애 많은 기간을 山林[산림]에 있으면서 학식과 성품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산림정승'이었다"고 말했다.
북인의 영수이자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이 죽자 남명학파도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업적과 많은 글들이 함께 역사속에 뭍혀 버렸다.
겉으로는 모두 퇴계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던 우리나라 유학에서 남명학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지금은 남명학파가 영향력을 미쳤던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경상도]를 중심으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소 등이 설립돼 있다.
이 교수는 "실질을 숭상하고 아는 것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정신이 남아있었더라면 18세기 실학이 도입되었을 때 富國[부국]의 측면에서 한층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남명학=
남명 조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
남명은 敬義[경의]를 중시했는데, 경은 수양하는 덕목이고 의는 실천하는 덕목이다.
실천을 중시해 실천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사변주의로 흐르던 유학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계학=
퇴계 이황의 성리학설과 사상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 분야
四端七情[사단칠정]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
주자가 심성론에서 性을 주요하게 삼은 반면 퇴계는 情을 주제로 삼았다.
퇴계가 남긴 글이 많기 때문에 연구가 활발하다
2012/02/09 동아일보
이상필 경상대 교수[한문학]
[출처] "2003년 古書(고서) 한 권이 발견됐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정인홍 쓴 '정맥고풍변'...퇴계 비판한 禁書(금서)의 사연" - "퇴계가 유학의 정통이라니..." 동아일보 2012-02-09 16:07